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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만화 삼국지』

by 답설재 2014. 2. 6.

거의 반 년 간 생각해 온 문제였습니다. 간단할 것 같았는데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는 아이에게는 어떤 책을 선물하는 것이 좋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책" 하면 독자 입장에서는 내가 전문가인 줄 알았는데, 이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게 되니까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러지 말고 아예 다른 걸 선물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게임기? 스마트폰?

 

 

 

 

교보문고의 이곳저곳을 무턱대고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무슨 좋은 수가 생각날까, 어떤 좋은 책이 눈에 띌까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나는 자신이 읽을 책을 고르는 데는 전문가일지 모르지만 독서의 전반적인 면에까지 두루 통달한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러지 말고, 진짜 전문가에게 물어보자!'

그 생각을 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며 당장 뭘 좀 알 것 같은, 그러니까 수습직원이 아닌 ―제복만 봐도 당장 알 수 있는― '고참' 종업원에게 문의했습니다. 그들은 고객들로부터 그런 문의를 자주 받고 있을 것 같아서 신뢰가 가기도 했습니다.

 

 

 

좀 멀리서 바라본 H코너

 

 

 

"아, 예. H코너로 가보세요."

"중·고등학교 학생이 읽을 만한 책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 묻자마자 그 종업원(진짜 전문가)은 '서슴지 않고', '당장' 그렇게 안내했고, 그런 질문쯤은 추가 질문을 받을 만한 문제도 아니라는 듯 곧장 사라졌습니다.

 

H코너……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그곳은 역시 각양각색의 문제집, 참고서가 '우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기가 막혀서, 버짐처럼, 아이의 온몸을 괴롭히는 아토피처럼, 공격적인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그것들'을 외면하고 얼른 돌아섰습니다.

그 아이도 살아 남으려면 문제집도 봐야 하고, 보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날의 내 느낌은 그 코너에서 허탈하고 징그러웠습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독서에 관한 한 중·고등학교 6년간은 '참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읍내의 중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보게 된 책들에 빠져 지낸 나의 지난날들이 아직도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학교 성적은 자꾸 내려가는데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은 줄어들기는커녕 자꾸 늘어나기만 했습니다.

 

3년이 지나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대본서점(貸本書店)'을 드나들며 아예 이런 목표를 설정해놓고 지냈습니다.

― 이 서점의 책부터 다 빌려본 후에 공부를 하겠다!

그러나 그 서점의 책들도 줄어들 줄을 몰랐습니다.

그 책들 중에는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 있어서 도전의식을 갖게 했고, 수준에 맞는 것은 재미 때문에 놓칠 수가 없었으므로 이래저래 책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세계 4대문명을 한 학기 동안 배운다. 도서관에 가면 초등학교 2학년 학생 수준에 맞춰 중국, 인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공부할 수 있는 책이 수두룩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세계와 친근하게 해 주는 '글로벌 교육'이다.1

 

프랑스는 수학과 철학의 나라이다. …(중략)… 국어 수업에서도 시험으로 리포트를 요구할 때가 많은데, 예를 들어 고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앞으로 한 달간 에밀 졸라의 작품을 3권 이상 읽고 그 작품 세계에 나타나 있는 시대 상황과 사회·경제·정치적인 역학 관계를 분석하라는 식이다. 이 때 남의 것을 베껴 쓰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좋건 나쁘건 간에 자신의 견해를 써야 한다.2

 

우선적으로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체계화된 독서 시스템이었다. 불어 수업의 경우 교과서가 아닌 문학책들을 돌아가며 읽고 요약 비판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중략)… 이 수업과 관련해 추천된 책은 족히 100권이 넘었는데, 이를 마스터하지 못한 채 바칼로레아에 임할 경우 적절한 인용구 도입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3

 

책과 학교 공부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으면,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삼국지』가 생각났고, 그 책의 번역본들을 뒤적이다가 내린 결론은, 어떤 번역본은 초등학교 학생에게 알맞고, 어떤 번역본은 어른들에게 알맞지만, 중·고등학교 학생에게 알맞은 번역본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행히 『만화 삼국지』는 여러 종이 나와 있었습니다. 이 코너에서는 전문가(종업원)가 전문가 행세를 하겠지, 싶어서 "중학생에게 알맞은 만화는 어느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글쎄요, 그 만화들은 저자가 각각 다릅니다."

아, 참!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래, 내가 그런 걸 물을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창피했습니다.

나는 순전히 혼자 힘으로 한 가지―지금 해외에 나가서까지 멋진 활동을 펼치는 만화가가 그린 책 ―를 고르고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이건, 내가 주고 싶은 선물을 상징하는 책이기도 하다.

▶ 어느 인물을 롤모델로 삼을 것인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유비나 조조 같은 인물 중 누구를 본받으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얘야, 부디 조조 같은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우습지 않겠는가(조조를 약삭빠른 놈으로 여기는 건 물론 편견이고, 황제는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 그렇다면 살아가면서 생각날 때마다 이 인물 저 인물로부터 본받을 만한 점을 찾아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말하자면, 이 만화를 선물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는데 필요한 인물사전이자 백과사전 『삼국지』!

 

 

 

『만화 삼국지』도 이본이 워낙 많아서 엉뚱한 이 책의 표지를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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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육동인, 『모두가 인재다』, 북스코프, 2013, 163쪽.
2. 최병권, 「타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가다듬자」(최병권, 이정옥 엮음, 『Baccalaureat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휴매니스트, 2003, 6쪽).
3. 최영주, 「교양이란 부차적일 뿐인가?」(위의 책, 15~16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