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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정리해야 할 욕심의 흔적들

by 답설재 2013. 12. 19.

 

 

 

 

― 이 책은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

― 이 책부터 읽어야 한다.

― 이건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

 

이런 이유로 놓이기 시작한 책들이 민망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코 이 현상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한심해하고 초조해하고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더러 그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 전공을 살리지 않기 때문일까? 전공을 확실히 하는 사람들은 그 분야의 책만 읽고, 보다 단조롭고, 확실하고, 깊이 있고, 그러니까 읽는 책도 정연한 걸까?

― 아무래도 욕심이 많은 탓이겠지? 책 읽는 시간도 적은 생활을 하고, 절대적으로 허용된 시간도 그렇고, 이래저래 읽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 무계획적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읽을 수 있는 양은 제한적인데 가까이 두고 싶은 책은 무제한이니까.

 

 

 

그러다가 '조선의 사랑방'에 관한 글을 읽게 되었고, 다음 부분에 밑줄을 그었고, 부끄러웠습니다.

 

 

사방탁자나 문갑 그리고 서안 같은 나무가구들은 조선시대 사랑방 미학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 가구만으로 사랑방 미학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주인의 감각이 더해져야 사랑방의 미학은 완성된다. 방에 있어야 할 것은 두고, 없어야 할 것은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 사랑방의 격식인 셈인데, 이때 있어야 할 것들이 어떠한 수준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있는가에 따라 그 방 주인의 품격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가령 벽에는 어떤 서화가 걸려 있고, 문갑 위에는 어떤 수석이나 난초가 있으며, 사방탁자에는 어떤 도자기가 놓여 있어 방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가 등등이 모두 주인의 인품과 미학적 감각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즉 사랑방의 정갈하고 우아한 멋은 곧 주인의 멋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랑방은 멋을 거부한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당히 멋을 부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멋은 많은 것을 참고, 버리고, 남기면서 마치 아무 멋도 내지 않은 것처럼 간결하고 질박한 것이다. 좋은 서화가 있어도 많이 걸지 않고, 귀한 책이 많아도 몇 권만 방에 두고, 너무 작아 책을 두 권 펼칠 수도 없이 자그마한 서안에 만족하는 멋이다.

 

                                                             ―― 이남호,1 「조선의 사랑방 가구와 남김의 미학」 중에서2

 

 

 

원인을 찾을 것도 없습니다.

단지 게으르고, 무질서하고, 아무런 생각이 없는 탓입니다.

연말이니까 아무래도 정리를 하고 새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책은 단 한 권뿐이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모습을 "온 천지에", "국내외에" 알려서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오늘날 이런 것까지 스스로 블로그에 기록해가며 살아가는 이런 생활이 그야말로 사람을(아니, 여러 사람을) 웃깁니다.

 

 

 

.....................................

1. 이남호 1956년 부산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1980년 『조선일보』 등단. 평론집 『한심한 영혼아』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 『문학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등. 저서 『보르헤스 만나러 가는 길』『상상력의 보물 창고』『이 쓸쓸한 뜰에 저 어지러운 구름 그림자』『일요일의 마음』 등(『현대문학』 2013년 4월호, 350쪽 필자 소개 참조).

 

2. 이남호, 「조선의 사랑방 가구와 남김의 미학」(『현대문학』연재 「한국적 미학과 지혜의 탐구:남김의 미학」제11회), 『현대문학』2013년 4월호, 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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