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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가수 이승철에게서 배우는 것

by 답설재 2013. 11. 25.

 

 

 

가수 이승철 인터뷰 기사가 토요일 신문 두 페이지 가득 실렸습니다. "슈퍼스타K 시즌 1~5 내내 심사위원 자리 지킨 이승철" "보컬의 神 이승철"(조선일보, 2013.11.13, 土日섹션 'Why?' B1~B2. '이길성 기자의 人사이드')

슈퍼스타K에 800만 명 이상이 몰렸고, 이번에만도 198만 명이 참여했다니, 가수 지망생들을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기사를 읽었을지…… '슈퍼스타K'가 뭔지 잘 모른다고 해야 할 나 같은 사람도 읽었으니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일찍도 배우는군!" 하고 비웃을 사람이 있겠지만, '이 가수에게서 이런 점을 배울 수 있었다면……' 생각하며 읽었고, 그걸 기록이라도 해두고 싶었습니다. 그 '학습'이 수많은 가수 지망생, 그의 팬, 가요 애호가들과 비슷할지 완전히 다를지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기사에서, '우리 같은 사람'(이승철에 대해 부끄러울 정도로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는 사람)이 이 가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기억해 두면 좋겠다 싶은 부분을 발췌해 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우선 다음과 같이 세 부분을 인용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① 이승철은 올해로 데뷔 28년차다. 그는 롱런의 비결에 대해 “가수의 창법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장르를 바꾸며 옷을 갈아입는다”고 말한다.

 

② (2000회 이상의 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었던 능력에 대한 답변) “콘서트는 감각 그런 것보다는 무조건 히트곡이에요. 대한민국에서 콘서트 하면 조용필·이문세·이승철 셋입니다. …(중략)… 대중은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지루해집니다. 아무리 셀린 디옹이라도 콘서트에 가서 내가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지루해요. 그런 틈을 안 줄 만큼의 레퍼토리를 가지려면 롱런하면서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야 하죠.”

 

③ 이승철은 다른 가수들 같으면 ‘한방에 훅 갈’ 수 있는 악재들이 끊이지 않았다. 데뷔 초기에 대마초 사건으로 구속, 솔로로 자리 잡은 뒤에는 톱여배우와 이혼, 그리고 수십억원을 들여 만든 스튜디오 침수, 2007년 표절 시비, 2010년 음주운전 등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스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비결에 대한 답변)

"운이 좋았던 건가요?"

“아뇨. 노래예요. 히트곡. 가수는 결국 모든 변명을 노래로 하는 거예요. 노래가 없으면 가수는 위기에서 무너져요.”

 

 

 

다음은 배우고 싶은 점들입니다.

 

이승철은 "일류는 자신은 무심하게 부르지만 듣는 이는 감동하고, 이류는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같이 감동하고, 삼류는 부르는 이 저 혼자 감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유형이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무심하게 이야기하는데도 교원들은 감동하는 유형에 대해서는 그런 유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 하기로 하고, 나와 교원들이 무엇엔가 함께 감동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고, 그러므로 나 혼자 감동해서 중얼거렸을 것 같고, 그리하여 내가 이야기한 것은 물론 나라는 인간 자체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교원들의 기억에서 포말처럼 흩어져 드디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이승철은 공연이 끝나면 관객이 다 나갈 때까지 무대에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요즘도 콘서트장 마지막 퇴장자인가요?

“그럼요. 정확하게 말하면 관객이 완전히 다 나갈 때까지는 아니고 10% 정도가 남을 때까지는 무대에 서 있죠.”

― 왜 그런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먼저 퇴장을 했죠. 우연히 관객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나가는 모습을 본 뒤 ‘사고 날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내가 좀 오래 있으면 안전하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 거죠. 일석이조예요. 계속 서 있으면서 사진도 찍어주고 하면 팬들도 좋아하고요.” 그는 팬들을 다 돌려보내고 마지막으로 돌아설 때 ‘가수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연히 먼저 나왔습니다.

다시 그 자리에 갈 기회가 있다면 아이들보다 나중에 나오겠습니다. 교사들보다 나중에 나오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

고위직에 있거나 권력을 가진 교육자들에게 부탁할 수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더구나 '꼴불견'에 대해서도 전해 주고 싶습니다. 그 수많은 행사장에서 국민의례와 인사말이 끝나면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곧 퇴장하는, 틀림없이 그렇게 하는, 그렇게 하는 것을 폼이 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 '빛나는 전통' 그렇지만 '우스운 전통'을 깨부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권력을 가지거나 고위직에 있게 되면 그렇게 해보이겠지만 이제 그럴 기회가 전혀 없어졌습니다.

 

― 가수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요?

“첫 시련인 ‘대마초 사건’ 때도 저를 지켜준 것이 소녀 팬들이었어요. 소녀 팬들의 환호도 행복했죠. 그러나 가장 큰 행복을 느낀 건 2004년 부활과 함께 ‘네버엔딩 스토리’를 발표했을 때였어요. 부활의 재결합에 환호한 남성팬들이 대거 콘서트장에 몰려오면서 콘서트가 모두 매진됐어요. 남성팬들이 울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제 가수 인생에서 가장 진한 감동이었어요. 결국 연장 공연까지 했었죠.”

 

저 대형 가수에 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린 교사는 더러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순간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런 일은 수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교원들은 다 사라져갔고, 나는 여기 혼자 남아 있습니다. 그 순간을 간직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 이 무대만큼 꼭 한번 서보고 싶다는 무대가 있어요?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죠.” 미국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상은 ‘음악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린다. “그래서 지금도 후회하는 게 영어를 정말 잘했어야 해요. 지금 제 딸아이들처럼만 영어 공부를 했다면…. 앞으로는 가수의 기본 자질이 영어가 될 거예요.”

 

"영어를 정말 잘했어야 해요." "앞으로는 가수의 기본 자질이 영어가 될 거예요."

'꼭 그렇지는 않은 멋진 이유'를 생각해 내거나, 그런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차라리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나의 경우,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제 늦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것은 멋진 교원이 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평생 번역서만 읽은 생각을 하면, 오늘도 어정쩡하게 번역한 책들을 읽으며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속상해 하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치졸한 번역문을 가지고 씨름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소비한 세월을 헤아려보면 한숨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 가수로서 야망이 ‘더 큰 권력’을 갖는 것이라고 했는데, 더 큰 권력이란 뭔가요?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죠. 지금 아프리카 차드에 학교를 짓고 있어요. 앤젤리나 졸리처럼 빈민 구호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는 권력요.”

 

흔히들 정치인들이 권력을 가졌다고 여깁니다. 또 행정가들은 우리 사회의 "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더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런 인식의 뒤에서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고급한 권력이 가수 이승철이 이야기하는 권력일 것입니다. 참 어쭙잖은 사람은 안타깝게도 저 가수가 이야기하는 고급의 권력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하기야 '정치'가 무엇인지부터 논의하자고 하면,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의사결정을 하며 정치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그런 것이 정치가 아니냐는 어깃장을 놓으면, 그는 딴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고급의 권력을 행사하면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 다 가졌어요. 돈, 명예, 가족. 왜 여전히 노래를 해요?

“정말 대중이 원하지 않을 경우는 미련없이 무대에서 내려갈 거예요. 다만 저 스스로 스타 계급장을 뗄 수는 없어요. 제 어깨에 붙은 스타의 견장은 대중들만이 뗄 수 있어요. 저는 은퇴란 단어를 제일 싫어해요.”

 

나는 '정년퇴임이 끝'이라는 걸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교육계에 몸담았던 그 시간을 '이승'처럼 여기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시간을 '저승'에 있는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승'은 아니라고 확신하며 지냈습니다.

퇴임을 하고도 학교를 기웃거리면 웃음꺼리가 되기 쉽상일 것은 분명합니다. 함께 근무한 동료들을 떠올려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은둔자가 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은둔자로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만하면 충분하니까 당신들이 나를 찾아오라!"는 건방진 사고를 가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어려운 것이 퇴임 후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퇴임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다는 생각이나 계획도 없이 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단이라는 무대를 내려오기는 했지만, 한 인간으로서 이 무대를 언제 내려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