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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삼송 시인」

by 답설재 2013. 11. 29.

삼송 시인

 

 

문성해

 

 

지하철을 타고 삼송을 지나면

삼송에 살다 죽은 시인이

내가 읽는 시집을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요즘 뭐 재미난 시집이 있냐고

이제 그곳에선 시 같은 건 안 써도 된다고

아직도 절구 같은 것이나 붙잡고 사는 나를

안됐다는 듯 본다

그곳의 긴 터널 같은 시간 속에서

시인은 시도 안 쓰고 뭐 하고 사나 궁금하고

(시 쓰는 귀신은 없는지 궁금하고)

난 죽으면 칠흑 같은 흉몽을 깁고 깁는 재단사나 되고 싶고

귀신들끼리 짝 찾아주는 듀오* 같은 일도 괜찮다 싶고,

 

삼송을 지나면

삼송에 살다 죽은 시인이

주머니에서 복숭아 하나를 내밀며

시 쓰는 일을 복숭아 베 먹듯 한번 해보라 한다

(다디단 과육보다 과즙이 오래간다 귀띔해준다)

나는 시인이 죽으면 가는 곳이 궁금해지고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이승에 두고 온 시를

그곳에서도 야금야금 되새김질할 것 같고

(그러면 표절이 될까 안 될까 궁금하고)

 

삼송을 지나면

삼송에 살다 죽은 시인이

그곳에선 시보다 더 좋은 일 천지라고

심심해서 시 쓰는 귀신은 없다고도 하고

지하철이 삼송을 지나치면

삼송 시인은 삼송까지만 시인이라서

헐레벌떡 내려버린다

 

나는 가끔씩 우연히

삼송에 살다 죽은 시인이 앉던 자리에 앉아

그가 건드리던 시상詩想을

공짜로 얻어 건질 때가 있다

 

 

 

* 듀오 : 결혼 정보 회사

――――――――――――――――――――――

문성해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1998년 『매일신문』, 2003년 『경향신문』 등단. 시집 『자리』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

 

 

 

 

 

 

 

그제 눈오는 날, 많이 온다고 했는데 낮에 잠깐 온 것에 대해 "이래저래 실망"이라고 한 사람이 많았던 그 날, 파주 해이리 출판단지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며 아주 작정하고 '삼송역'을 살펴봤습니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을 때, 혹 저 '삼송 시인'이 서성거리는 환영(幻影)을 볼 수 있지나 않을까 싶어서 문성해 시인이 시집을 읽고 있었다고 한 것처럼 짐짓 책을 펴들고 있다가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얼른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았고, 출입문이 열렸을 때는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내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주욱' 살펴보기까지 했습니다.

 

거기 어디쯤 있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열차가 머무는 시간이 짧아서 놓쳤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 특성 때문에 못 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에게나 다 보인다면 신문에도 나고 괜히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난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일산 쪽으로 볼 일이 있어 그 역을 지나게 되면 일단 딴 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파는 일 없도록 하고 혹 시간이 널널하면 내려서 군데군데 살펴볼 작정이긴 합니다.

 

 

 

 

삼송 시인이 저 시인에게 묻더랍니다. "요즘 뭐 재미난 시집이 있냐?"

또 그러더랍니다. "이제 그곳에선 시 같은 건 안 써도 된다."

 

시를 쓰며 살아가는 일이 '오죽하면' ―시 쓰는 일만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이제 시 같은 건 안 써도 되는" 저승의 사정을 자랑했을까 싶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교육자가 된 것을 한탄하다가도 이내 '다시 태어나도' 어차피 혹은 마땅히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마음을 고쳐 먹게 되는 것처럼 "시도 안 쓰고 뭐 하고 사나" 궁금해하고 "시 쓰는 귀신은 없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또 이내 말을 바꿉니다. 삼송 시인의 저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곳에선 시보다 더 좋은 일 천지"라고.

그렇다면 그곳에는 교육보다 더 좋은 일도 천지이겠습니까?

 

좋은 일 천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 '삼송 시인'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보십시오. "요즘 뭐 재미난 시집이 있냐?"

인간이(귀신이 된 사람도 마찬가지!) 겉은 속일 수 있겠지만 가슴 속까지 다 감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삼송 시인은 삼송까지만 시인이라서 헐레벌떡" 내려버린답니다.

뭐 그렇겠지요. 아무리 좋은 귀신이라 하더라도 계속 붙어 다닐 리야 없겠지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쁘고 해서 귀신하고 그렇게 길게 노닥거릴 수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좀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는 귀신 측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주면 좋을 텐데…………

 

 

※ 『현대문학』 2013년 6월호.

 

 

 

 

이 블로그에 실어놓은 귀신에 관한 글 중에서 딱 세 편만!

 

시 「저승사자는 아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blueletter01/382081

책 『귀신백과사전』('사실은' 아이들 보라고 낸 책이지만 그러다보니 아주 쉽고, '사실은' 참 흥미로운 책)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7845

잡문 「저승사자와 함께 가는 길」 ☞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7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