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홍보지
Ⅰ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유치하다고 해야 할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저런 그림을 보면 아련한 향수에 젖어 듭니다.
정작 집 모양이나 자작나무 숲이 우리 것 같지 않은데도 저 하늘과 마을길, 냇가 등의 분위기에서 그동안 흔히 봤던 마을들을 떠올립니다. 방학을 맞은 마을도 떠오릅니다.
눈이 쌓인 날의 산골은 딴 세상인 듯 조용했습니다. 길을 나서기도 어려웠고, 굳이 나설 일도 없어서 마음도 편했습니다.
1950년대의 초등학교 국어책에서였는지, 교사가 되어서 가르친 국어책에서였는지, 눈이 쌓인 산골의 초갓집 단칸방에서 누가 뭘 하는지 밤 늦도록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시와 그 아래로 비켜서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도 생각납니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초등학교 국어책에 실린 시, 밤 늦도록 누가 뭘 하는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내 친구 박두순 시인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답이 왔습니다.
"박두진 시인의 '하얀 눈과 마을과'입니다. 하얀 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얀 눈과 마을과
박두진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눈이 덮인 마을에
하얀 꿈 위에
쏟아질 듯 새파란
별이 빛난다.
눈이 덮인 마을에
별이 박힌다.
눈이 덮인 마을에
동이 터오면
한 개 한 개 별이 간다.
등불도 간다.
Ⅱ
그 시인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그렇게 여기기로 했습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 시와 삽화를 꺼내볼 수는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교과서를 봤습니다. 편수국 근무 시절부터 교과서에 파묻혀 살았고, 나중에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모든 교과서의 발행을 일일이 결재하는 자리에 있었으므로 해마다 수천 권의 교과서를 만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나라들의 교과서도 많이 구경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머릿속에만 남아 있어 꺼내 볼 수도 없는 그 교과서의 몇 페이지가 더 생생합니다. 그리워집니다.
Ⅲ
저 그림 속 마을로 가야할 것 같은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림에서 눈을 돌리면,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아직은 여기 있지만……' 하고 착각을 합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초조하여 그동안 밑작업한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는" 어느 작가의 "생사여탈하고 유유자적하기를 바란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을 쓴 내 친구 블로거가 물었습니다.
"당신도 그렇습니까?"
작가도 아닌데 뭘 내놓을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처음에 수술대에 올라갈 때는 얼른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치열하게 살아온 것들을 정리라도 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가득했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단 1%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두 번째, 세 번째 실려가면서 '그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자꾸 이러다가 이 길로 영 가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치열함은 무슨……'
'정리는 무슨……'
이 상태 이대로, 이 순간 이대로, 다 수용하면서, 그동안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이들에게, 단 한 명에게라도 더, 내가 생각해온 것을 다 이야기해주고 갈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초조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허락될 때까지만 가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 편하게 가지라고, 그렇게 지내라고 스스로에게 부탁하며 지냅니다. 좀 욕심을 내어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기간이 길어지기를 기대하며 지냅니다.
Ⅳ
돌아가기는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저런 마을로.
교과서의 그 겨울밤을 생각했습니다.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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