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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상)

by 답설재 2013. 7. 28.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상)

서석연 옮김, 범우사 1996

 

 

 

 

 

 

 

밤낮없이 일하다가 학교에 나왔을 때의 5년간은 한가한 느낌을 주는 나날이었다. 그때는 그야말로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했다. 다음은 그때 이 책 상하권을 읽고 발췌한 노트이다.

 

 

대다수의 민중은 특히 항상 연설의 힘에 의해서만 움직여질 수 있다. 그리고 위대한 운동은 모두 대중적인 운동이며, 인간적 정열과 정신적 감수성의 화산 폭발이며 잔인한 곤궁의 여신에 의해서 선동되거나 대중한테 던져진 말의 횃불에 의해 선동된다. 결코 미(美)를 논하는 문사나 살롱 영웅의 레몬 주스 같은 심정토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166)

 

사람들은 역사를 실제로 이용해야만 할 때 그 가르침을 잊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며, 이제는 사정이 바뀌어 역사의 영원한 진리가 이미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도 아니다. 사람들은 역사에서 바로 현재에 대한 교훈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달성하지 못하는 사람을 정치적 지도자라고 뽐내선 안 된다.(180)

 

는 일찍이 소년으로서나 청년으로서 적어도 한번은 국민적 격정이 공허한 망상이 아닌 것을 행동에 의해 입증해 보고 싶은 소망을 종종 느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확신하지 않은 채 만세를 외치는 것은 언제나 죄악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모든 장난이 끝나고 운명의 여신이 무정한 손으로 민족이나 인간을 그 지조(志操)의 진실성과 확고함의 저울에 달기 시작한 장소에서 한번도 입증하지 않은 채 이 말을 사용하는 자기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도 이제 마침내 이 무기력한 감정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자랑스런 기쁨으로 부풀어올랐다.(239)

 

선전은 수단이며, 따라서 목적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형식은 그것이 봉사하는 목적을 원조하는 데 적합해야 한다. 목표의 중요성은 일반적 필요의 관점에서 변할 수 있고 또 선전의 내면적 가치는 그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는 것도 명백한 일이다.(257)

 

선전의 과제는 개개인이 학문적 훈련이 아니라 어떤 일정의 사실․과정․필연성 등에 대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있다. 이리하여 그 의의가 우선 대중의 시야 안에 놓여야 한다.(261)

 

과제는 원래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자나 교양을 추구하고 통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의 교화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작용은 대부분 감정에 호소하고 이른바 지성에 대해선 크게 제한돼야 한다.

선전은 모두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이 목표로 하는 중에서 최하급의 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정돼야 한다. 그러므로 획득해야 할 대중의 수효가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지적 수준을 더욱 낮추어야 한다.(261)

 

선전의 지적 짐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리고 그것이 주로 대중의 감정을 한층 고려하면 고려할수록 그것은 더욱 효과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선전 캠페인이 올바른가 그른가의 가장 명백한 징표이고, 몇 명의 학자나 젊은 미학도를 기쁘게 하지는 못한다.(262)

 

그런데 사람들이 선전 기술에서 대중을 향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을 이해한다면 거기에서 다음의 교훈이 생긴다. 즉 학술적 교화처럼 선전에 다양성을 주는 것은 잘못이다. 대중의 수용능력은 매우 한정되어 있고 이해력은 적지만 그 대신 망각력은 크다. 이 사실에서 모든 효과적인 선전은 요점을 크게 제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슬로건처럼 이용하고 그 말에 의해 목적한 것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떠올려질 수 있도록 계속적으로 행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이 원칙을 저버리고 이것저것 넣으려고 하자마자 주의는 산만하게 되고 효과는 희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대중은 제공된 소재를 소화하거나 기억해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 그 결과는 약화되고 마침내는 없어지게 말게 된다. 그러므로 선전은 단순한 노선을 따르고, 이에 따라 기본적 전술은 심리학적으로 건전해야만 한다.(262~263)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냉정한 숙고보다 도리어 감정적인 느낌으로 생각이나 행동을 정하는 여성적 소질을 갖고 여성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쇄적이다. 이 경우 섬세함은 존재하지 않고,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음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고, 결코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또는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266)

 

가장 뛰어난 선전공작도 언제나 기초적 원칙이 예민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성과가 없다. 선전은 몇 가지 요점으로 제한되고 이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끈질김이 세상일의 많은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여기서도 성공에 이르는 제1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제이다.(267)

 

선전의 목적은 둔감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흥미있는 변화를 공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확신시키기 위해, 그것도 대중을 확신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둔중함 때문에 하나의 일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도 언제나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가장 간단한 개념조차 몇천 번의 반복을 통해서만이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변경할 적마다 선전에 의해 추구되는 것의 내용을 결코 바꾸어선 안 되고 오히려 결국 언제나 같은 것을 말해야만 된다. 이를테면 슬로건은 물론 여러 방면으로 설명되어야 하지만, 모든 언급의 결론은 언제나 영원한 슬로건 그 자체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선전이 통일된 완전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결코 벗어나선 안 되는 이러한 큰 선만이 꾸준하고 시종일관된 강조와 함께 궁극적 성과를 허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와 같은 끈질김이 얼마나 거대하고 거의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성과로 이끌어가는지를 경탄과 함께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광고는 장사의 영역이건 정치 분야건 그 이용의 계속성과 한결같은 통일성을 통해서 성과를 얻는 것이다.(268)

 

이념이 추상적으로 바르고 따라서 강력해지면 질수록 그 완전한 실현은 그것이 실제 인간에 의존하는 한 더욱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강령 입안자와 자질은 그 목표의 실현에 의해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목표의 바름이나 그것이 인류의 발전에 미친 영향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종교의 창시자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헤아려져서는 안 된다.(301~302)

 

앞을 내다본 장래의 계획은 훨씬 그 뒤에 겨우 실현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그 이익은 후세에 비로소 도움이 되므로 대중은 그러한 장래의 계획보다도 맥주나 우유의 가격인하 쪽이 우선은 더 잘 이해되는 것이다.(303)

 

이른바 ‘인텔리켄차’는 원래 언제나 의무교육을 완전히 받지 못하고 필요한 지식을 얻지 못한 자에겐 실로 한없는 경멸의 태도로 대하는 법이다. 어떤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결코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무엇을 배웠느냐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받은 사람들’에겐 아무리 지독한 돌대가리라도 충분한 졸업장에 휩싸여 있으면 그가 이 귀중한 종이 봉투를 갖지 못한 가장 명석한 청년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것이다.(319)

 

전쟁 전의 독일 교육은 매우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극히 일면적인 방법으로 순수한 ‘지식’을 주입시키는 목적으로 편성되고 ‘능력’이 목표로 되는 일은 적었다.

개인적인 성격형성----이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한----은 보다 경시되고 기꺼이 책임을 맡는 심정을 장려하는 일은 아주 적었고 의지와 결단력을 위한 교육은 전혀 없었다. 그 교육의 결과는 실제로 강한 인간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 독일인이 전쟁 전에 일반적으로 간주되고 그 때문에 평가받았던 대로 온순한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 되어 나타났다. …(중략)… “고개를 숙이면 어디든지 무사통과이다”라는 훌륭한 속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337~338)

 이러한 사람들이 더 저열한, 더 무지한, 또는 순전히 악의있는 교육자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국가 및 국민의 가장 중요한 이익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들의 교육을 감시하고 온갖 부정을 저지할 의무를 가진다. 국가는 그때 특히 신문을 감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문의 영향은 그것이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주어지므로 이러한 인간에게 극히 강렬하고 더구나 효과적이기 때문이다.(345~346)

 

구제국의 가장 명백한 몰락현상의 하나는 문화수준이 점차 저하한 점이다. 여기에서 나는 문화라는 말로써 현재 ‘문명’이라 불리고 있는 것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명’이란 오히려 반대로 참으로 높은 정신수준 및 생활수준의 적인 듯 생각된다.(369)

 

정부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아직 그렇듯이 휴스턴 체임벌닌(영국인으로 나치즘 이데올로기의 선구적인 사상가, 1853~1927, 저서 “19세기의 기초”)과 같은 사람의 인식을 아주 냉담하게 무시하였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어리석었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필요한 것을 배우기에는 너무 자만심이 강했다. 이것은 옥센셰르나(수웨덴 수상, 1583~1654)로 하여금 “세계는 지혜의 한 조각에 의해 지배된다” 하고 외치게 한 아주 오래된 진리이다.(387)

 

선전을 현명하게 되풀이해서 사용하면 국민으로 하여금 천국을 지옥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극히 비참한 생활을 천국으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유태인만이 알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에 따라 행동했다. 독일인, 더욱 적절히 말하면 독일인 정부는 그 점에 대해 희미한 예감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런 모든 점으로 인해 우리는 전쟁 중에 가장 심한 시련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395)

 

독일 국민이 육군에게 힘입은 바를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모든 것’이다.(400)

 

그들(유태인)은 무한한 교활함을 가지고 아리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잠들어 있는 사회정의에의 욕구를 운좋게 더 나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까지 높이고, 이렇게 해서 사회적 폐해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에 매우 확실한 세계관적 낙인을 찍는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의 이론을 창시한다.(457)

 

신념은 지식보다도 동요시키기 어려우며, 애정은 존경보다도 변화되는 일이 적고, 원한은 혐오보다도 영속적이다. 이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혁명의 원동력은 어떤 시대에도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과학적 인식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고무하고 있는 열광, 또는 종종 그들을 몰아세우는 히스테리에 있었다. 대중을 획득하기를 바라는 자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열쇠는 객관성도 아니고 따라서 나약함도 아니며 의지와 힘이다.

민중의 마음을 획득하는 것은 자기의 목표에 대해 적극적인 투쟁을 수행해 감과 동시에 이 목표의 적대자를 절멸시키는 경우에만 성공할 수 있다.(482~483)

 

어떤 이념을 이 세계에서 구현하고 있는 모든 강력한 조직의 위대성은 그 조직이 열광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하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그의 의지를 비타협적으로 관철하는 종교적 열광과 불관용 속에 존재하고 있다. 어떤 이념이 그 자체로 정당하며 이런 식으로 무장되어 이 지상에서의 투쟁을 시작할 경우에는 그 이념은 무적이며 그것에 대한 어떤 박해도 모두 그 내부적 강화를 가져올 뿐일 것이다.

기독교의 위대함은 얼마간 유사한 성질을 가지고 있던 고대의 철학적 의견과 타협 교섭을 시도한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교리를 전도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데 있어서의 굽힐 줄 모르는 열광에 있었던 것이다.(499)

 

유태인은 이러한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바로 인류와 그 문화를 파괴하는 점에서만 뛰어난 위인을 가진 유태인은 그와 같은 위인을 우상적으로 숭배하도록 배려한다. 그들은 다만 여러 민족이 제각기 고유한 위인을 존경하는 것을 가치 없는 일인 것처럼 극력 주장하고 그에 대해 ‘개인숭배’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다.(502)

 

이 목적에 적합한 것은 단지 정신과 육체가 저 군대적 미덕, 즉 그레이하운드와 같은 민첩성, 가죽과 같은 강인성, 크룹 철강과 같은 견고성 등으로 아마 가장 잘 묘사될 수 있는 미덕을 자기 것으로 만든 인간뿐이었다.(507)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 : 이 명칭의 앞부분의 표현은 우리들에게서 고대 열광자, 즉 이른바 ‘민족주의적 이념’이라는 말에 궤변을 갖다 붙이거나 이 주문만 끊임없이 음미하고 있는 피상적인 인간들을 멀리해 주었다. 또 뒷부분의 표현은 ‘정신적인 칼을 찬 기사’라는 거추장스러운 모든 무리 및 ‘정신적 무기’를 자기들의 실제의 비겁성을 숨기는 방패로 생각하고 있는 가련한 애송이들 모두로부터 우리들을 해방시켰다.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들은 그 다음 시대에는 특히 이 후자의 무리들로부터 가장 격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그것은 물론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펜에 의해서 뿐이었다. …(중략)… 그들은 타고난 겁쟁이여서 그와 같은 위험에는 놓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끄럽게’ ‘주제넘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온순하게’ 일하기 때문이다.(517)

 

선전 : 대중에 대한 효과를 고려할 것, 몇 가지 점에 집중할 것, 같은 것을 끊임없이 되풀이할 것, 교의의 텍스트를 의심할 바 없는 주장의 형식으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또 자부심을 가지고 요약할 것, 보급에는 최대의 끈기를 갖고 효과의 기대에는 인내를 가질 것 등(520)

  

 

   ☞ 무서운 민족주의적 세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