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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순신 『난중일기』

by 답설재 2013. 7. 12.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국보 76호) 조선일보 DB

 

 

 

『난중일기(亂中日記)』!

이 책을 읽은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필독도서나 권장조서 목록에 넣은 학교는 얼마나 될까?

 

'아! 시험문제 내기 좋은 자료구나!'

이렇게 하기는 쉽겠지?

 

다음 중 유네스코 기록유산이 아닌 것은 어느 것인가? (    )

① 훈민정음 ② 조선왕조실록 ③ 직지심체요절 ④ 해인사 장경판전 ⑤ 동의보감

 

다음 중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자료는 어느 것인가? (    )

① 난중일기 ② 훈민정음 ③ 동의보감 ④ 일성록 ⑤ 수원화성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난중일기』와 위대한 어머니

 

 

독서 교육을 이야기할 때 흔히 '필독 도서'니 '권장 도서'니 한다. 필독 도서는 학생들의 경우 공부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책이어야 당연하다. 물론 교과 공부만 공부가 아니라고 하면 필독 도서의 범위가 넓어지게 될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예전에 전국적인 시책으로 추진한 바 있는 '고전 읽기식' 필독 도서는 학생들이 책의 내용을 잘 암기했는지 객관식 문제로 시험도 보게 했고 그처럼 싫어하는 독후감을 억지로 쓰게 했으므로 억지 필독 도서가 되고 말았다. 공부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경우를 국사 교육에서 찾아보면, 우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난중일기』같은 책들이 필독 도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국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려면 이런 사료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수적이진 않지만 국사 학습에 도움이 되는 책이라면 그러한 책은 당연히 권장 도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이러한 책의 원본이 국보니 뭐니 하는 것은 잘 가르치면서도 정작 그러한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가르치지 않는 교육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대체로 성실한데도, 그 학생들 대부분 『난중일기』가 무엇인지는 알면서도 난중일기를 실제로 읽지는 않는 이상한 학생들을 만들게 되는 교육을 해온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어느 학생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하고 있다.*

 

"모두 기본적으로는 성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은, 쓸데없는 공부는 하지 않아요. 이 정의를 따른다면 막스 베버를 읽는 시간조차도 낭비가 될 수 있어요. 물론 시험 범위 안에 포함된 내용이라거나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해 읽겠지만요."

 

새삼스런 설명이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간상이나 당시의 상황, 역사적 인물들, 임진왜란의 전황은 물론 장군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나타나 있으므로 이런 책을 읽게 하면 인성 교육이니 효성 교육이니 말로만 강조하는 교육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중략)...

 

실제로 『난중일기』를 읽게 하는 것이 올바른 독서 교육이다. 다음은 『난중일기』에서 옮긴 것이다.**

 

임진(1592년, 48세) 1월 1일(임술) 맑음. 새벽에 아우 여필(汝弼)과 조카 봉(菶)과 아들 회(薈)가 와서 이야기했다.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병사의 군관 이경신(李敬信)이 병사의 편지와 설 선물과 또 긴 편전 등 여러 가지 물건을 가져왔다.

 

5월 29일(무술) 맑음. 우수사가 오지 않으므로 혼자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 곧장 노량에 이르러, 미리 만날 약속한 곳에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다. 왜적이 있는 곳을 물으니 적은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바로 거기 가 보니 왜인들은 벌써 상륙해서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밑에 벌여 놓았는데, 항전하는 태세가 아주 튼튼했다. 나는 모든 장수들을 독전하며, 일제히 달려들어 화살을 빗발치듯 퍼붓고 각종 총통을 바람 우레 같이 쏘아 보내니, 적들은 두려워 물러나는데, 화살에 맞은 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왼편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 활군과 격군 중 탄환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태우고 물러 나왔다.

 

6월 1일(기해) 맑음. 사량 뒷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충무공의 효성, 임진년 5월 29일의 전투 상황, 짤막한 한 마디로 진중 생활을 엿보게 하는 일기이다. 『난중일기』는 전편을 통하여 이순신 장군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어 사실은 어느 날짜의 일기를 보아도 상관이 없다.

 

계사(1593년, 49세) 6월 12일(을미) 비가 오다 말다 했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털이 무엇이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종일 혼자 앉아 있었다. 사량(蛇梁)이 다녀갔다. 밤 10시쯤 변존서(卞存緖)와 김양간(金良幹)이 들어왔다. 행궁(行宮)의 기별을 들은 즉 동궁께서 편찮으시다고 하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유 정승의 편지와 윤 지사의 편지가 왔다. 종 갓종과 철매들이 병으로 죽었다니 참 가엾다. 해당이란 중도 왔다. 밤에 원 수사의 군관이 와서 명나라 군인 5명이 들어왔다고 전하고 갔다.

 

갑오(1594년, 50세) 1월 1일(경진)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늦게 군사 훈련차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는 그치지 아니했다. 신사과(愼司果)에게 문안하였다.

 

10월 29일(계유) 맑음. 서풍이 춥기 살을 에는 것 같았다.

 

11월 25일(기해) 흐림. 새벽 꿈에 이일(李鎰)과 만나 내가 많은 말을 하며 “이같이 국가가 위태하게 된 날을 당하여 몸에 무거운 책임을 지고서도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고 생각은 하지 않고 배짱 좋게 음란한 계집을 끼고서 관사에는 들어오지 않고 섬 바깥 여염집에 있으면서 남의 비웃음을 받으니 그래 어떠하며, 또 수군 각 고을과 포구에 배정된 병기를 육군에서 독촉하기에 바쁘니 이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냐” 하니 순변사가 말이 막혀 대답을 못하는 것이었다.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니 그것은 꿈이었다. 식후 대청에 나가 앉아 서류를 처리해 보냈다. 조금 있자니 우우후, 금갑도 만호가 와서 젓대를 듣다가 저물어 돌아갔다. 흥양의 총통 만드는 색리들이 와서 회계를 밝히고 돌아갔다.

 

을미(1595년, 51세) 5월 29일(신축) 비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퍼부었다. 사직(社稷)의 위엄과 영험을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치는 바가 있다. 장수의 직책을 가진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로는 교서를 외면서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음을 어찌하랴.

 

7월 3일(갑술) 맑음. 아침에 충청 수사에게로 가서 문병하니 많이 덜해졌다고 했다. 늦게 경상 수사 권준이 와서 이야기한 뒤에 활 10순을 쏘았다. 밤 10시에 탑선이 들어왔는데 “어머님이 평안하시긴 하나 입맛이 안 달다고 하신다” 했다. 민망스럽다.

 

9월 14일(계미) 맑음. 늦게 나가 공무를 보고 우수사와 경상 수사가 함께 와서 작별하는 술잔을 같이 나누고 밤이 깊어 헤어졌다. 선수사와 작별하며 준 시 절귀 한 절.

 

북쪽에 갔을 때도 같이 일하고

남에 와 죽고 삶을 같이 하더니

오늘밤 이 달 아래 잔을 나누면

내일은 우리 서로 떠나겠구려.

 

아이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쉽고 간편하다. 이런 자료를 두고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라" 어쩌고 하는 건 얼마나 싱겁고 쓸데없는 일인가.

 

"이것 봐, 충무공은 왜적과 싸우는 중에도 일기를 썼지 않니?" "충무공께서 나라를 지키려고 애쓰시던 모습이 나타난 곳을 찾아볼까?" "부하를 걱정하신 부분 중에서 특히 감명 깊은 부분은 어디일까?" ……. 이런 물음만 던져주면 그만 아니겠는가.

 

또 있다. 그분의 어머니를 향한 끝없는 그리움. 『난중일기』에서 '어머니'라는 이름은 한없이 위대하다. 사실은 어머니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위대하다.

 

내 인생은 119와 같다. 아니 자기 일을 가지고 있고 결혼한 한국 여자들은 거의 다 119 소방대원 같은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여성 이야기』라는 책에서 인용하였다. 이 책에 대한 어떤 신문의 기획 기사는 그 제목을 「어머니로부터의 탈출 모색」이라고 하였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엄청난 어려움을 숙명처럼 지고 살았다. 그것을 이야기하면 남성들은 입을 닫고 머리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나라 여성들이 그렇게 사는가 물을 때 "절대적이다" "그렇다"고 답할 남성이 그처럼 많을까. 사실은 남성들 중에도 "단 하루도 사이렌 소리를 듣지 않고" 살아온 날이 없었던 것 같다고 할 사람도 많다. 그런 남성은 "그러므로 나의 인생도 사실은 '119와 같았다'"고 할 것이다. 나의 책임자는 '나'이지만, 남녀가 함께 하는 경우의 책임자는 이제 '여성'도 '남성'도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다. '육아'로 인하여 여성이 어머니로서의 자리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면 남성 중에는 억울해 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마빈 해리스의 다음 글을 보면, 육아는 여성의 막강한 권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고양이나 말에게 지배받을 수 없는 것처럼, 단지 신장이 더 크고 체중이 더 무겁다는 이유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성이 자기 아내보다 체중이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겠는가? 동물 중에는 인간의 남성보다 30배나 더 무거운 동물도 있지 않은가? ……. 육아권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어떤 생활양식도 바꾸어버릴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오늘날 여성들 자신이 먼저 '어머니로부터의 탈출'을 모색해보는 시대가 되었고, 혹은 그러한 구상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역시 '어머니'라는 이름은 위대할 뿐이다.

 

아무리 이름 없이 살아가는 여인일지라도, 아이를 낳아 이 세상의 일원이 되게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여자는 이미 인간의 중심이며, 세상의 빛이며, 빛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나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후에야 깨달았다. ******

 

어머니와 갓난아기는 '파트너'가 아니다. 갓난아기는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제공받고 보호받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를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갓난아기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뭔가를 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지 그러한지, 위에서 인용한 『난중일기』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어머니'를 그리워한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다만 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도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길이 없다.

아침에 흰 머리털 여남은 오라기를 뽑았다. 흰 머리털이 무엇이 어떠랴마는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었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어머님이 평안하시긴 하나 입맛이 안 달다고 하신다" 했다. 민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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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치바나 다카시․이정환 옮김,『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청어람미디어,2003 : 1판4쇄), 201쪽.

** 이응렬 역,『국역(國譯) 충무공 이순신 난중일기』(세창서관, 1974). 오래된 책이어서 지금은 이보다 더 잘 나온 책이 많다.

*** 김승희․윤석남,『김승희․윤석남의 여성이야기』(마음산책, 2003), 71쪽.

**** 문화일보, 2003. 4. 9, 문화기획기사「어머니로부터의 탈출 모색」.

***** 마빈 해리스․박종렬 옮김,『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 1995), 86쪽.

****** 애니타 다이아먼트․이은선옮김,『빛의한가운데』(홍익출판사,1998), 360쪽.

******* 데스몬드 모리스․박성규 옮김,『접촉』(지성사, 1994),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