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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조세프 케셀 『소울 아프리카』

by 답설재 2013. 5. 30.

조세프 케셀 장편소설 『소울 아프리카』

유정애 옮김, 서교출판사 2009

 

 

 

 

 

 

 

 

 

 

 

화자(話者)는 동아프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케냐 ‘암보셀리 보호구역’의 작은 마을을 방문합니다. 그 마을에서, 전설적인 밀렵꾼 출신으로 암보셀리를 종횡무진하며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블리트, 그의 아내 시빌, 신비로운 소녀 파트리샤를 만납니다. 파트리샤는 블리트와 시빌의 딸입니다.

 

소녀도 아버지처럼 킬리만자로가 바라다보이는 암보셀리를 누비고 다녀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고집스럽고 자부심에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그 평원의 야생으로부터 피어나는 진실, 자유, 천진난만함으로 이루어진 왕국에서 기린, 누, 영양, 얼룩말, 코뿔소, 물소, 코끼리, 원숭이와 같은 동물들은 물론 마녀처럼 숫사자 '킹'과 가장 깊은 마음으로 교감하며 지냅니다.

 

 

 

 

“마을 사람들은 백인아이를 몹시 좋아해요. 아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아이가 그들을 겁나게 하나봅니다.”

“겁나게 한다고?”

“선생님, 그 아이는 마녀래요. 그 애는 사자를 아버지로 둔 게 틀림없다고 죄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들 말은 그 애 아버지가 사자를 닮았다는 건가?“

“아뇨! 사람들이 말하는 건 진짜 아버지가 사자라는 거예요.”(85~86)

 

파트리샤의 아버지 블리트는 사자처럼 용감무쌍한 남성입니다. 그렇지만 이 대화에서 '아버지'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낸 사자 킹과 소녀의 교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어머니 시빌만은 소녀의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파트리샤가 문명사회의 교육을 받지 않고 야생동물과 지내는 생활을 지긋지긋하게 혐오하면서 "여긴 지옥!"이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야기는 킹의 죽음으로 마지막에 이릅니다. 파트리샤를 연모하는 마사이족 최고의 전사 오리우냐가 사자 킹에게 도전했을 때, 끝까지 "참으라!"는 파트리샤의 지시를 따르던 사자가 드디어 오리우냐를 덮쳤을 때, 전설적인 총잡이 블리트가 나타나 단 두 발의 총으로 사자를 사살했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보호하는 것이 블리트의 책임이지만 사람을 보호하는 것은 그보다 더 무거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파트리샤는 어머니 시빌의 평소 소원대로 나이로비의 기숙학교로 떠납니다. 그러나 소녀가 그곳에서 마음을 달래며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는 전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성애, 우정, 힘, 피의 맛, 질투, 애정과 같은 모든 감정들을 파트리샤는 킹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죽음의 느낌을 발견하게 한 것도 역시 킹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잊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동안 『소울 아프리카 Soul Africa』라는 '제목'('소울' 그리고 '아프리카'의 의미)에 좀 속은 게 아닌가 싶었으나, 다 읽고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동물과의 소통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실망스러운 인간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슴아픈 사랑, 인간보다 나은 동물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학생들, 특히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이, 이런 소설을 읽으며 성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학입시 준비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됩니까? 나중에 얼마든지 읽어도 됩니까? 그럼, 도대체 언제 그 '얼마든지'가 가능합니까? 칠십 정도 됐을 때? 마땅히 할 일이 없어졌을 때?(나처럼.)

 

공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백인들은 왜, 어떤 이유로 세계 이곳저곳에 가 있는 것인지, 좀 더 이야기하면 자기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점에 대해서 얼마쯤은 못마땅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콜롬부스는 왜 에스파니아나 이탈리아는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발전을 위한 진출'입니까? 일본인들도 우리나라에 '진출'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부가 그렇게 합니까? 그런 말 마십시오. 이미 그들의 교과서에 그렇게 실려 있고, 그 일부가 그렇게 말하면 나머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어떻게 일부입니까?

 

공연한 것일지 모르는 말을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육자들은, 학생들과 교감하며 가르치고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교감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