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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

by 답설재 2013. 5. 2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백년 동안의 고독』

이가형 옮김, 하서, 2009 개정판

 

 

 

 

 

 

마을에서 도시로 발전해서는 기이하게도 다시 안개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 간, 콜롬비아의 마콘도라는 곳 이야기, 말하자면 떠나온 유럽하고는 너무나 다른 남아메리카 콜롬비아, 그 밀림 속에서 그들만의 세상을 창조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좌절, 슬픔, 희망에 관한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마콘도, 그 곳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술라 이구아랑 부부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 이야기로부터 100년간 그 가족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파란만장하고 기이한 일들을 역사처럼 기록한 소설입니다.

그 이야기는 집시 예언자인 멜키아데스의 양피지를 해독(解讀)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5대손(마지막 자손)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죽음으로써 끝나게 됩니다.

 

그는 예언을 앞질러 자기가 죽는 날과 그때의 모습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마지막 행을 찾아볼 것도 없이 그는 이미 이 방에서 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양피지 해독을 마친 순간에 이 신기루의 도시는 바람에 무너져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사라져 버릴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또, 100년간의 고독을 운명으로 타고난 가계는 두 번 다시 이 지상에 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 적혀 있는 모든 것은 과거와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영원히 반복의 가능성은 없다고 예상되었기 때문이다.(476)

 

 

 

잘못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제목의 '고독' '백년'이라는 단어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그 사랑을 받지만, 모두들 쓸쓸하게 늙고 시들어 사라져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부인 우르술라는 징손자, 고손자가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뭐 하려고 이렇게 온갖 일을 겪나?' 싶을 만큼 오래오래 살며 그 고독을 견딥니다. 그것은 그들의 아들, 반란의 영웅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이런 인물입니다. 그가 얼마나 놀라운 인물이면서도 얼마나 쓸쓸한 인물인가, 그가 어떤 고독의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는가는 이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32회나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때마다 패했다. 그는 17명의 여자에게 각각 한 사람씩 모두 17명의 아이를 낳도록 했으나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차례로 남의 손에 죽어 갔고, 가장 오래 산 아이도 서른다섯을 넘기지 못했다.

대령은 또 14번의 암살과 73회에 걸친 복병 공격, 한 차례의 총살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는 말 한 마리를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만큼의 스트리크닌strychnine이 든 커피를 마셨는데도 죽지 않았다. 대통령이 준 훈장도 거절했다. 최후에는 전국을 지배하는 혁명군 총사령관의 지위에 올라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되었으나 그래도 사진만은 절대 찍지 못하게 했다. 전후戰後에 지급될 종신 연금도 거절하고 마콘도의 작업장에서 만든 물고기 금세공을 팔아서 얻은 돈으로 노후를 보냈다. 늘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싸웠으면서도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라고는 총탄 자국 하나뿐이었다. 약 20년에 걸친 내란에 종지부를 찍게 된 네르란디아 협정에 서명한 뒤 스스로 가슴에 대고 권총을 쏘았으나 탄환이 급소를 빗나가 등으로 간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생애를 보내고 남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 대령의 이름이 붙은 마콘도 거리뿐이었다. 그러나 노환으로 죽기 2~3년 전에……(127).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난과 쓸쓸함, 기이한 생애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집니다.

 

큰 권력에 따른 고독 속에서 그는 나아갈 길을 잃어 갔다. 점령한 도시에서는 환호로 맞아 주었다. 그러나 적에게도 같은 환호를 보낼 것이 틀림없는 민중들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그는 자기와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똑같은 음성으로 지껄이고, 자기와 똑같은 태도로 응수해 오며 자기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젊은이들을 도처에서 만났다. 그는 흩어진 자기의 씨앗이 이곳저곳에서 움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자 오히려 심한 고독감에 빠졌다. 부하 장교들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204).

 

 

 

고독……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 일족이라고 해서 사랑의 따뜻함을 외면했겠습니까? 그 따뜻함을 외면하여 스스로 고독해지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삶에서도 오히려 열정적입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아들 호세 아르카디오가 결혼식을 올린 날의 이야기입니다.

 

식을 올린 그날 밤, 레베카는 슬리퍼 속에 숨어 있던 전갈에게 발을 물렸다.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아팠으나 두 사람의 소란스러운 첫날 밤에는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근처 사람들은 하룻밤에 8번이나, 그리고 낮잠 잘 때 3번씩이나 온 마을 사람들의 잠을 깨우는 신음 소리에 넋이 나갔으나 이 밑도 끝도 없는 정열이 죽은 자의 잠을 깨우는 일이 없기만 빌 뿐이었다.(115~116)

 

사랑에 대한 작가의 표현력은,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가령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딸 아마란타의 사랑 얘기입니다.

 

아마란타의 상냥한 마음과 삼가고 있는 듯하면서도 상대방을 송두리째 감싸는 애정은 애인의 둘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8시가 되어 돌아갈 때가 되면 그는 반지 없는 새하얀 손으로 그 거미줄을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132)

 

사랑이란, 이렇게 집요하고 치열한 것인데도 어떻게 변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사람을 고독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는 것입니까?

 

 

 

알베르 까뮈는 "자살을 해서야 되겠는가?"를 주제로 한 철학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서 "모든 열정의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같이, 끝내 좌절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썼습니다(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1993, 중판, 99쪽).

그럼, 그 100년 후,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의 자손이 세상에서 모조리 사라져간 후에는 누가 남아서 그 고독을 달래고 극복하며, 혹은 사랑으로써 고독하지 않게 살아왔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은, 얼마든지 영원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태엽의 힘으로 굴러가는 장난감 마차처럼 영원한 사랑을 만들려고 애쓰며 살아가도록 마련되어 있는 삶, 인간이 그런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기이하고 환상적인 일들이 빈번한데도 전혀 허황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이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4년 11개월하고 이틀 동안 비는 줄곧 내렸다. 이슬비가 내릴 때도 있어 그때마다 사람들은 옷을 차려입고 환자 같은 얼굴로 날씨를 축하했으나, 그것은 일단 그쳤다가 더욱 사납게 퍼붓기 위한 조짐이었다. 항아리 밑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억수로 쏟아졌고, 북쪽에서 엄습해 오는 태풍 때문에 지붕이 날아가고 벽은 기울었다. 얼마 남지 않은 농장의 바나나 나무도 뿌리채 뽑히고 말았다.(367)

 

그는 일본 해안에서 조난당해 2주 동안이나 표류한 적이 있었다. 일사병으로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먹으며 굶주림을 달랬는데, 소금기가 있는 그 고기는 바닷물에 씻기고 햇살을 받는 동안 마치 환약처럼 달콤해졌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의 뱅갈만 해상에서 바다 드래곤과 싸워 그것을 잡아 놓고 배를 갈라 보니 십자군 전사의 투구와 무기가 나왔다. 또, 카리브 해에서는 과다류브(난티르리 제도 중 프랑스령의 섬)로 가는 항로를 잃고 표류를 계속하는 해적 빅토르 유구(쿠바의 아레포 캄펜디에르의 소설 <빛의 세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유령선과 만났다.(112)

 

이 기이하고 환상적이고 열정적인 이야기가 콜롬비아 혹은 남아메리카의 역사를 상징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나는 남아메리카는커녕 남아메리카 사람 하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전철역에서 그들 특유의 악기로 슬픈 음악을 들려주는 몇 사람을 보았다고 해서 좀 만나본 척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 마추피추나 그런 곳을 구경하고 사진까지 찍어온 사람은 그들의 생활상, 정서, 내력, 신념, 자부심, 슬픔, 인내…… 어쨌든 그들에 대해 뭘 좀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이 소설이 남미 혹은 콜롬비아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읽는 이들이 그들의 신비주의가 이 소설 곳곳에 베어 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미국대학위원회 선정 SAT 추천도서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BBC 선정 꼭 읽어야 할 책

《옵저버》 선정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소개를 보면, 이 소설은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어디 보자!' 하고 시작해야 하는데, 이처럼 놀랄 준비부터 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있어서 제대로 감상을 하는 건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저 더 재미있는 책을 찾아갈 뿐입니다. 이 책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나, 소란을 피우던 어떤 날 밤 알바로에게서 문학은 인간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장 좋은 장난감이라는 것을 배웠다. 아우렐리아노는 얼마 후 비로소 그 같은 독단적인 의견은 카탈로니아 태생의 학자 말을 흉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나이의 말에 의하면 지식이라는 것은 이집트 콩의 새로운 조리법을 생각해 내는 데 쓸모가 없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것이었다.(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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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1993, 중판), 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