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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토드 메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by 답설재 2013. 7. 22.

토드 메이 『죽음이란 무엇인가』

서동춘 옮김, 파이카, 2013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죽음들을 슬퍼하는 사람을 찾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죽었다는 인식 때문인지, 유족들도 '우리는 할 일을 다했다'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생활수준도 좋고 의술도 좋아서 웬만하면 오래 사는 건 좋은 일이지만, 죽음의 의미가 그렇게 변한다면, "늙으면 순순히 가야 한다"는 의미 같아서 착잡해집니다. 그렇게 가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독하겠습니까? 어느 죽음인들 고독하지 않은 경우가 있겠습니까만,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하나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슬퍼하기보다는 애써서 숙연하다는 걸 보여주거나 너나없이 좀 들뜬 분위기에서 그 사고 혹은 죽음의 경위를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며 자신이 당하지 않은 사고와 죽음에 대해 얼마쯤 안도감을 느끼는 것 아닌가 싶은 경우를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장례식장을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금방 그 '죽음'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죽음과 죽음의 불안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인식을 피하려 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유한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하며 살아갑니다. 죽음과 그 무의미함의 위협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닌 척하며 살아갑니다(70~71).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제1장)의 형체입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살아 있는 한 그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옳고 바람직합니까?

"자살을 할 것까지는 없다" 아니,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의식이 또렷한 사람에게는 노령과 그것이 예고하는 것은 놀라울 게 못 된다. 사실상, 노령의 공포를 자신에게 숨기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만 그는 의식이 또렷한 인간인 것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뭘 그러느냐?" "인생은 60, 아니 요즘은 70부터이다." "당신은 아직 멀었다.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 심지어 "그러지 말고 우리에게로 나오라! 좋은 수가 있다"고 권유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 모든 것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다. 유럽의 곳곳에 있는 공동묘지들이――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끔찍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만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죽음은 우리에게 싫은 느낌을 주며 우리의 인내심을 지치게 한다.2

 

 

 

 

죽음에 관한 책을 대하면 늘 숙연해지고, 매번 이 책도 죽어보진 않은 사람이 쓴 책'이어서 숙연해서 읽기 시작한 것만큼 충격을 주지는 않는구나, 하고 좀 싱거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고는 '앞으로 죽음을 더 자주 생각해야지' 다짐했으니까 소득은 충분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삶은 사는 동안 그 중간 어디에서도 끝날 수 있다"는 것, 즉 "삶은 궤적을 가지며, 죽음에 언제나 취약하다는 인식이 없었더라면, 죽음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19)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연구한 저자 토드 메이는, 철학자답게,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하이데거(『존재와 시간』 제2장)의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설명에 바탕을 두고, ▷'죽음은 우리 존재와 경험의 끝'이고, ▷'그 끝은 성취나 목적이 아니라 그냥 멈추는 것'이며, ▷'죽음은 필연적이며 불확실하다'는 세 가지 주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이처럼 죽음은 삶의 끝에 위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사실상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고 했습니다(40~41).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이 설명은 이 책에서 여러 가지 관점으로 되풀이됩니다. 예를 들면, 죽음에는 삶에 중요성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무언가가 있으나, 죽음이란 사실에 직면했을 때 삶이 덧없어 보이는 삶의 무의미함은, ▷죽은 후에는 어떤 것도 남지 않고, ▷삶에 어떤 의미도 부여해주지 않으며, ▷실들을 끊는 그 죽음은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62~63).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면, 지상의 삶은 시행착오나 준비작업 혹은 예행연습쯤이 되어버리고, 인간의 삶은 사후세계에 의해 그 중요성을 갖게 되며, 따라서 지상에 존재할 동안 발생하는 일은 그 중요성이 떨어지게 되므로, 가령 프리드리히 니체에게 있어 종교란, "어떤 우월한 초월적인 존재의 이름을 빌려 우리 세상을 모독하는 도구였다"는 대목도 재미있었고(64),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공언하는 사람에게 '파스칼의 내기'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사람은 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썼는데, 그것은 설령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해서 잃을 게 하나도 없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 잃을 게 많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38~39).

 

종교는 관심사가 아니어서 그런지 더 인용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지 말고 영영 죽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만사(萬事)가 해결되겠습니까? 이 기사 좀 보십시오.3

 

"2045년이 되면 인간은 노화와 질병을 완전히 극복,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된다."

황당한 몽상가의 헛소리 같지만, 이 주장을 한 사람의 미래 예측 적중률은 86%에 이른다. IQ가 165이고 명예박사 학위만 19개나 되는 구글 엔지니어 이사 레이 커즈와일 얘기다.

 

과학자들은 매번 기가 막히는 일들을 해냅니다. 약 30년 후에 과학자들이 정말로 그런 일을 벌이게 되면―그들이 한다고 해놓고 그만두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죽음에 대해 새로 연구해야 할 철학자들은 갑자기 많이 바빠지겠지만, 지금은 불멸(不滅, 不死)에 대해 아예 경멸하면서 '죽음과 불멸의 딜레마'(제2장)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126).

  • 우리가 유한한 피조물인 것은 좋은 일이지만 죽기에 좋은 시간이란 없다.
  • 죽음은 우리 삶에 형태를 만들고 일관성과 의미를 부여한다. 죽음은 삶의 순간들을 귀중하게 한다.
  • 그러나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위협하기도 한다. 죽는 것은 선(善)하지만, 그러나 바로 지금은 절대 아니다.지금은 절대 아니라면? 그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 그 순간에 대해, 죽어야 하는 순간에 대해, 죽음과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기'(제3장)를 하라는 것입니다.
  •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기', 대학 건물을 위해 돈을 기부할 수도 있고, 저술을 통해서, 아이를 낳아서 추구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작은 위로'에 불과하답니다(140~141).

 

삶에 대한 집착을 줄이면 죽음이 덜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집착을 줄여서 삶이 덜 중요하게 인식된다면, 죽음 또한 덜 중요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고대 에피쿠로스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추구한 길'입니다(147).

 

죽음은 다음 세대가 품위 있게 살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는 이타(利他) 논쟁other-regard(↔self-regard)이나 '파도가 바다로 돌아가듯 자아가 흩어진다'고 생각하는 도교 철학도 소개되었습니다(151~152).

 

 

 

 

죽음을 두고, 자신이 믿는 철학에 따라 살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정리한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의 기록,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은, 현실에서 살면서 동시에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현실에서 미래를 취하는, 비교적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161~ ).

 

우리는 순간의 충만함과 미래의 우연성 속에서 삶을 살며, 경력을 쌓고, 우정을 나누며, 열정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허약성을 인식하면서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을 쉽게 구별할 수 있으므로 죽음은 삶의 알맹이와 껍질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186).

 

그렇긴 하지만, '그래! 죽음이 그런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겠어!'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이 의문을 숨기거나 멈출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부터 새로 읽어야 하겠습니다. 지난날 그 책에서 무얼 읽었는지 한심하긴 하지만, 그 황제가 조용조용 이야기하던 그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는 기억만으로도 다행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삶에 부여한 순간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죽음은 비극이 아닐 것"(190~191)이라는 설명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어쨌든 죽음이 비극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저 표지 사진은, 먼 길 떠나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모습인가,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런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 땐 저렇게 쥐는 게 아니지 싶고, 이른바 '연출'이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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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101쪽. [본문으로]
2.위의 책 120쪽. [본문으로]
3.조선일보, 2013.7.20(토), A1면, [21세기 에디슨 '2045년쯤 인간은 안 죽는다'](Weekly BIZ 기사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