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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토마스 만 『마의 산』

by 답설재 2013. 8. 22.

서글픔을 느끼게 한 책입니다. 939쪽이나 되었습니다.

저 책을 만만하게 펼치고 앉아 있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이 유명한 책을 찾게 된 것은 『카뮈를 추억하며』 때문이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디노 부자티의 희곡 「흥미로운 증례」**를 번역해서 연출했다. 그는 더 강한 활력을 주기 위해 작품의 길이를 줄였다. 이 희곡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환자들이 병원 창문을 통해 건강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환자들에게는 이들이 낯설게 보인다. 두 진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각 진영에는 다른 진영에 대한 완전한 이해 불가능성이 지배하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 『마의 산』의 요양소 거주자들이 경험하는 그 야릇한 느낌을, 똑같은 병에 걸린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그 연대감(이것 때문에 그는 요양소에서 오는 편지라면 일일이 몸소 답장을 썼다)과 함께 자주 맛보게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고독한 위인의 비장미가 아니라, 전우(戰友)의 비장미가 표출된다. 알베르 카뮈는 이 두 가지 비장미를 모두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병실에 누워 있어보면 당장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환자들이 병원 창문을 통해 건강한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환자들에게는 이들이 낯설게 보인다. 두 진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솟아오른다. 그리고 각 진영에는 다른 진영에 대한 완전한 이해 불가능성이 지배하고 있다."

 

몸 이곳저곳에서 침대 주변의 기기로 주렁주렁 끈이 매달려 있고, 창 너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부산한지,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있어야 하게 되었는지, 나는 결국 박살이 난 건지…… 말하자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인지, 온갖 상념이 파도처럼 몰려옵니다.

 

넘을 수 없는 장벽! 병실 유리창은 얇고 건너편이 훤히 다 보이지만 그 건너편 세상은 이쪽과는 다른 세상, 넘어갈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의 산'일 수도 있습니다. 넘을 수 없는 장벽이기도 하고, 그 안팎은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진영'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의 산』의 요양소 거주자들이 경험하는 그 야릇한 느낌", "똑같은 병에 걸린 이들이 서로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그 연대감", 고독한 위인의 비장미(悲壯美)가 아니라 전우(戰友)의 비장미가 어떤 것인지, 그걸 경험에 비추어 확인하고 싶어 이 책을 찾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나로서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좋을 분명한 느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카뮈를 추억하며』라는 책을 번역한 이가 『마의 산』에 붙인 주 때문이었습니다.

 

"토마스 만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다보스 요양소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도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유럽 문명에 대한 심층적 묘사, 죽음과 시간에 대한 서정적인 명상이 내포되어 있다."***

 

"죽음과 시간에 대한 서정적인 명상"……

이런 걸 좋아한다고 하면 말이 됩니까, 어떻습니까?

 

 

 

 

이런 얘기를 하면 "가소롭다" "우습다"고 할 이가 있겠지만 나는 지금 좀 바쁘고 얼마쯤 초조하기도 합니다.

 

이건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인류문화유산은 너무나 거대하고, 내가 여기 오기 전에도 이미 거대했고, 내가 다녀가고 난 뒤에도 여전히 거대할 것입니다. 그걸 좀 들여다보든지 말든지는 순전히 내 사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문학가들이 그렇게 하려고 하듯이 인류문화유산의 '해석'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알베르 카뮈와 장 그르니에 때문에 저 두꺼운 『마의 산』을 읽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아주 절박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어서 우선 '축약본'을 읽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인상을 풀어서 말로 표현한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 되었다. 죽음은 경건하고 명상적이며 슬프고 아름다운, 즉 종교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만, 그러나 또 이것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성질, 지극히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성질, 아름답지도 명상적이지도 경건하지도 아니한, 사실은 슬프다고도 할 수 없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49~50)

 

"그렇지만 시간은 도대체 '본원적인' 것이 아니야. 시간은 길다고 생각하면 긴 것이고 짧다고 생각하면 짧은 것이야. 그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길고 짧은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지." …(중략)… "왜 그렇다는 거지? 그렇지 않아. 우리들은 시간을 측정하고 있잖아. 그 때문에 시계도 있고 달력도 있는 것이지. 한 달이 지났다고 한다면, 그건 자네에게나 나에게나 우리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지나가는 거야." …(중략)… "자네 나한테 말해줄 수 있겠나? 공간은 감각기관으로 인식할 수 있네. 시각과 촉각으로 말이야. 그건 좋아. 그러면 도대체 시간을 인식하는 기관은 무엇일까? 우리들은 시간이 경과한다고 하네. 좋아,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간다고들 하지. 그러나 시간을 잴 수 있으려면… 시간이 측정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가야만 하네. 그러나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간다는 것이 어디에 쓰여 있는가? 우리들의 의식으로는 시간이 균등하게 흘러가지는 않네. 의식적으로 그렇다고 가정하고 있을 뿐, 우리들의 시간 단위란 단지 관습일 뿐이지."(55~56).

 

나의 생각을 죽음에 지배당하지 말도록 하자! 착한 마음씨와 인간애가 그 가운데 드러나며, 그것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위대한 힘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자를 벗고, 까치걸음으로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은 과거의 위엄을 나타내는 장식깃을 달고 있으며, 인간 자신은 죽음에 경의를 표하여 엄숙하게 검은 옷을 입는다. 이성은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성은 단순히 덕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은 자유이자 방종한 모험이고, 기형(奇形)이자 쾌락이기 때문이다. 쾌락은 사랑이 아니라고 나의 꿈은 말한다. 죽음과 사랑, 이것은 운(韻)이 맞지 않으며, 황당무계한 잘못된 운인 것이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는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한 생각을 갖게 한다. 형식도 오로지 사랑과 착한 마음씨에서 생기는 것이고, 분별력 있고 우호적인 공동체와, 인간의 아름다운 나라의 형식과 예의 바름은 피의 향연을 조용히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 이렇게 나는 생생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레잡기를 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죽음을 성실하게 대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레잡기를 한다면, 그것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 및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해 두기로 하자.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자! 이것으로 나는 끝까지 꿈꾸었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기 때문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난 이 말을 찾고 있었어.(115~116)

 

다음날 요하임에게는 비단 셔츠가 입혀졌고, 시트는 꽃으로 장식되었다. 희미한 눈빛을 받으며 조용히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유명의 길로 들어선 직후보다도 더 멋져 보였다. 긴장의 흔적은 이제 얼굴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고, 차가워진 얼굴은 말없이 순수하기 그지없는 형태로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어떤 조문객들은 이 머리에는 고대의 투구가 제격일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121)

 

 

 

 

죽음, 시간, 사랑과 죽음, 그리고 주검의 모습에 대한 부분 중 한 가지씩을 옮겼습니다. 그렇지만 이 부분들이 그렇게 감명깊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의 이러한 책읽기의 한계를 보여주는 결과일 것입니다.

 

 

 

 

덧붙입니다. <지은이에 대해>라는 글에서 다음 문장입니다.

 

1948년 여름 토마스 만은 이 작품을 다시 잡고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이라는 연대기를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소설'이라는 부제를 지닌 이 책을 그는 단 3개월 만에 탈고했고, 이 연대기는 《파우스트 박사》의 생성 과정 및 계획, 형상화에 대해 보고하는 일기다.(36)

 

이 문장에서 토마스 만이 "이 작품을 다시 잡고"라는 부분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앞뒤 문장을 보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문장에서 앞부분은 "탈고했고"로 끝나 뒷부분에 이어지고, 그 뒷부분은 "일기다."로 끝납니다. 이 문장은 어떤 형식의 문장인지, 그 의미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우둔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길 없었습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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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그르니에, 이규현 옮김, 『카뮈를 추억하며』(민음사, 2012, 1판8쇄), 150~151쪽.

** 이탈리아어로는 '임상증례'이다. 원래는 더 거창한 문제(이 말에는 비꼼의 의미가 있음-역주)였다.(원주, 즉 그르니에의 주)

*** 위의 책, 150쪽 각주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