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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장 그르니에 『카뮈를 추억하며』 Ⅱ

by 답설재 2013. 9. 8.

장 그르니에 『카뮈를 추억하며』

이규현 옮김 , 민음사 2012

 

 

 

 

 

 

 

 

□ 독서에 대하여

 

이렇게 읽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문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닥치는 대로 읽고 싶었던 욕심, 많이 읽고 싶었던 욕심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는 일찍 '책벌레'가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책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 책들 속으로 숨어버렸다.

 

돈 될 만한 일들을 살펴보듯 책들이 있는 곳에 가보는 취미가 큰 장애는 아닐 것이다.

쑥스러워서 그 습관을 고치겠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 의미 있는 일도 아닐 뿐더러 누가 듣기나 하겠는가. 스스로도 이제와서 그나마 우스운 일 아니겠는가.

 

열여덟 살에 그는 또한 프루스트를 창조자라고 생각했다(이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였다). 그는 프루스트 작품의 엄격한 구성과 꼼꼼한 세부 묘사 사이의 대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프루스트에 대한 그의 경탄은 이제 프루스트의 책을 그만 읽어야겠다고 씁쓸하게 말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껴온 많은 것을 프루스트에게서 찾아낼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은 <모든 것이 끝났다. 다시 생각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나로서도 프루스트의 세계가 그에게 맞을지 모르고, 정말 우연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에게 주었던 만큼, 그의 이러한 찬사에 더욱 큰 행복감을 느꼈다.(76)

 

카뮈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좀더 흥미 있는 간행물이 나오지 않았나 하고 둘러보기를 좋아했다. 겉보기로는 자신과 아주 동떨어진 영역들에 대해서도 그러했다.(77)

 

말없는 어머니, 쉽사리 마음을 터놓지 않는 귀머거리 삼촌, 일상의 살림살이 걱정만을 입에 담는 할머니를 둔 별로 안락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온 그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삶의 찬란한 빛에 우선 놀라고 눈이 부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때때로 들른 서민 도서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은 그에게 마법의 세계를 열어주었다.(156)

 

요컨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생긴 것이다. 정신의 연대에 비하면 육체의 연대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157)

 

어린 시절에 이른바 교양 있는 환경에서 살지 못한 사람, 주위에서 책 읽는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에, 오늘날 교양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존중, 아니 오히려 숭배라고 해야 할 어떤 태도가 더 강렬해지고 따라서 한없이 더 중요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의 소산을 좀처럼 매춘의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157)

 

문단에 좀 지나치게 자주 드나들거나 학위 사냥을 하다 보면 애호가에 그치거나 책벌레가 되기 십상이다.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 교양적 지식에서 비길 데 없이 훌륭한 수단을 찾아내서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들을 열광케 할 수 있다.(157~158)

 

 

□ 궁핍함이나 고통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고리키의 천재성은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에 대해 눈감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마음의 상처를 통해 들어온 그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킨 것이 그의 천재성이었다는 것이다.

그르니에는 카뮈 또한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을 탈피할 줄 몰랐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그 궁핍함을 이야기하는 건 얼마나 치졸한 변명인가.

 

청소년기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앙드레 드 리쇼의 『고통』, 루이 기유의 『민중의 집』 『친구들』을 들고, 알베르 카뮈가, 이 책들 덕분에, 가난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이 작품의 자양분 구실을 하며, 다른 많은 사람들은 감추고 잊어버려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고리키의 천재성은 그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것에 결코 눈감아 버리지 않고, 마치 아름다움이 상처를 통해서만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불행을 아름다움으로 변모시키지 않았을까?(81~82)

 

 

□ 죽음, 행복, 종교에 대하여

 

카뮈의 글을 읽으면 곳곳의 행간에서 죽음과 행복에 관한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내세(來世)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종교에 대해 악의적이거나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이승에서의 삶이 괴롭고 힘들고 어려워도 저승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걸, 그렇게 믿고 살겠다는 걸, 뭐하려고 말리겠는가. 이야기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것이다.

 

어느 날은 브라질 대학생들로부터 왜 <철학적인> 희곡을 쓰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알다시피 그의 대답은 재치 있는 경구였다. 「사람은 죽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 두 문장 속에 아주 개괄적인 철학이 들어 있습니다」(96)

 

그는 영원한 삶의 약속에 대해, 흔들리지만 언제나 영원한 활기로 타오르는 불꽃을 대립시켰다.

 

유일한 행복은 지상에서의 행복이며, 유일한 삶은 속세에서의 삶이다. 알베르 카뮈를 생각할 때는 이 출발점을 꼭 상기하자. 이것을 도달점으로 여기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111~112)

 

종교를 주제로 한 우리의 대화는 드물었다. 나는 언제나 그가 종교에 속하는 모든 것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의 기본적 입장은 확고했다. 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전능한 신이 있다면 악은 훨씬 더 수치스러운 것이 될 것이었다. 미래의 삶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교회는 이 신과 이 미래의 삶이라는 것의 이름으로 현재의 삶을 중독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벨 Bayle(프랑스 작가, 1647~1706)의 말을 기꺼이 되풀이했을 것이다. <두 삶은 너무 과하다. 하나의 삶만 필요했다.>(132)

 

알베르 카뮈는 X 신부의 흔들리지 않는 종교적 신념에 크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이 신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는 가공할 개종 전문가야」 그가 신부에게 당신에 의하면 니체는 틀림없이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신부는 활기차게 응수했다. 「아이고, 아니지요. 만일 그가 천당에 가 있지 않다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거요」 (133)

 

 

□ 건강과 사치에 대하여

 

건강하지 못하면 불행한 것인가?

사치를 향유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사치란 어떤 것인가?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가?

 

그는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기에 온 힘을 다해 건강을 회복하고 싶어했고, 청소년 시절에 몹시 가난했기에 진정한 사치를 향유하고 싶어했으며, 어쨌든 태양 아래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언제나 빛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했다.(134)

 

팀가드(알제리의 유적 도시)의 모자이크에서 나는 이런 글귀를 읽었다. <놀고 사냥하고 멱감는 것, 이것이 바로 삶이다.>(135~136)

 

이상한 것은 그가 겉보기에는 전혀 병자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다. 내가 그를 알게 된 무렵 그는 운동 선수로 나설 듯했다. 그는 공을 몹시 좋아했다. 그의 나이 때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삶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갑자기 그는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으며, 조심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시골이나 고지대에서 요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강이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졌다가 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는 병의 심연에 빠져 하마터면 침몰할 뻔한 것만큼 재빨리 다시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그만큼 그의 생명력은 강했다.(148~149)

 

 

고독과 자유에 대하여

 

『시지프의 신화』에 등장하는 세 유형의 사람들, 정복자, 돈 후안, 배우에 대하여.

 

돈 후안은 무자비한 색광이었나? 그가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전전한 것은 사랑의 결핍 때문이었는가? 그는 완전한 사랑을 추구한 신비론자였는가? 돈 주앙은 우울한 사람이었는가? 그는 노령(노령)을 맞이하지 못하고 그 무절제와 불경스러움 때문에 벼락을 맞아 죽었는가?

 

그 배우들은 어떻게 하여 자신의 배역에 열정을 바치고 끝내 배우이기를 고집했는가? 아드리엔느 르꾸브뢰르는 임종의 자리에서 기꺼이 고해를 하고 성체 배수를 하려 했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직업을 버리는 일만은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그 은혜를 입지 않았다. 한 배우의 운명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고독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그는 얼마나 자유로웠는가? 그 자유를 어떻게 하여 획득했는가?

 

돈 후안의 어떤 모습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을까? 그것은 언제까지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로서뿐만 아니라 <완전한 행복에 싸여 있으면서도 위험한 난바다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지배자로서의 모습일 것이다. 고독을 채우는 수단이 있다. 그것은 연극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희곡의 창작과 연출, 연기, 무대 장식이다. 알베르 카뮈에게 연극은 무한히 늘어난 삶이었다.(114~115)

 

그는 사회 생활에서 활달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 덕에 자기 자신 속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는 각기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각자에게 적합한 태도를 취했다.(151)

 

그는 내면의 감정을 새삼스럽게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면의 감정을 아주 침착하고 냉정하게 결정적으로 이미 구체화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레서 어떤 때에는 카뮈와 대면하면 변모당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이야기해야겠다. 통상 그와의 대화는 즐겁고 익살과 재치가 넘치는 것이었다. 그의 조형적 소질은 창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생활 속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152)

 

심한 고독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중략)… 거기서는(연극으로 생활하던 파리에서는) 낮일을 끝낸 뒤 자기 앞에 펼쳐지는 밤의 공간 속에서 한가롭게 자신의 환상에 따라 돌아다니는 이들이 맛보는 그 강렬한 삶을 살아갔다.(152)

 

그는 친척과 친구를 만족시키려 하면서도 이 고독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했다. 고독은 괴로움의 한 원인이지만 동시에 창작하는 이에게는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153)

 

그는 무엇보다도 자유롭기를 열망했다. 그는 자유에 목말라했다.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선물 받기에 동의하는 사람에게서 이 자유의 일부분을 떨어져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선물을 주는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선물을 거절하게 된 것이다.(153)

 

 

표현에 대하여

 

카뮈의 표현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그러나 삶이 일상적인 표현으로 구성된다는 걸 생각하면 누구라도 그 기능을 연마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가령, '숨김 없이 이야기하자.' '암시하기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자.'……

 

나는 알베르 카뮈의 목소리가 왜 <폐부를 찌르는지> 잘 알고 있다. 그는 숨김도 암시도 없다. <방백으로>도 <어중간한 목소리로>도 말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그는 말해야 할 것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술책이 없다. 몇 사람밖에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한 작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는 첫번째 문장에서 꺼낸 말을 두번째 문장에서 철회한다」

다음으로 그는 자기 자신의 전부를 걸고 말을 한다.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일부분이 아니다. …(중략)… 그는 그들의 가장 깊은 욕구, 그들의 가장 온전한 욕망을 표현한다.(155)

 

 

□ 창작(일생, 삶)의 이유에 대하여

 

'그래, 맞아! 행복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아. 그리고 그 시간이 길지도 않아.'

'너털웃음까지는 필요없어. 언제나 순간뿐이야.'

 

행복이 쟁취되었을 때, 그는 불운으로 낙담했던 것 이상으로 행복에 도취되지 않는다. 그는 기쁨과 쓰라림이 뒤섞인 감정으로 초연함을 되찾는다. 그리하여 온갖 정세에 대해 초탈해지는 한층 높은 정신의 경지로 올라선다. 그를 영원토록 혼자이게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따라서 상황에 대한 이 지배력이다.

야성의 부르짖음.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헉명가의 아내가 사랑하는 이의 처형 소식을 듣고 지르는 절규가 아닐까? 그녀가 헐떡거리며 남편이 처형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묻는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대답한다. 끔찍한 절규. 이것은 『전락』에서 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그 여자가 지르는 외침이 아닐까? 그리고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틀림없이 『외침』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자, 이제는 다음과 같은 카뮈의 금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창작을 택했다.>(182~183)

 

일상적인 삶, 여기에서 문제되고 있는 유일한 삶에서, 그리고 이 삶의 가장 명백하게 진부한 부분에서, 알베르 카뮈는 자기 지배의 표지인 그러한 냉정함의 본을 보여주었다.(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