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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여기는 토의·토론 교실입니다

by 답설재 2013. 8. 19.

새벽 꿈의 끄트머리에서 교실 앞에 서 있는 교사가 방문객에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토의·토론 학습 교실입니다."
그렇게 안내하는 그 교사가 누군가 싶어 쳐다보았더니 '아, 이런!' 그게 바로 나였습니다.

 

 

 

카뮈는 이렇게 썼습니다.1
"대지의 여러 모습들이 기억에 너무도 꼭 매달려 있을 때엔, 행복의 손짓이 너무도 집요할 때엔, 인간의 마음 속에서 우수가 일게 되는 것이다."

 

학교를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친 것은 더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그 학교, 그 교실에 나의 흔적은 있을 리 없고, 그러므로 나를 기억할 교원이나 나를 기억할 학부모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의 '여러 모습들이 기억에 너무도 꼭 매달려'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어디 혹 토의·토론 학습을 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교육자를 보셨습니까?

하기야 아이들을 그렇게 다루려면 많이 귀찮겠지요. 작정하고, 일일이 '그 세계', 그러니까 아이들의 세계, 그리고 토의·토론의 주제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하면, 교과서에 적힌 대로 설명해 주는 것은 얼마나 단조롭고 쉽고 편리한 일입니까? 그걸 누가 못하겠습니까?

 

토론을 시키는 교사가 더러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더러'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편을 갈라 토론을 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그러니까 1970년대의 교실에서 '한·일 정상회담'이나 '한·미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 하다못해 '아들의 나쁜 버릇 문제로 다투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식의 역할학습(role play)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똑바로 앉아서 그때까지 5, 6년간 교사들의 설명을 듣기만 한 그 아이들의 입을 열어주기 위해 그런 학습을 시켰습니다. 심지어 "남녀 중 어느 쪽이 우수한가?" 그걸 토론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어쩌다가 할 수 있는 학습일 뿐입니다. 걸핏하면 편을 가르는 학습을 한다면 국사 시간에 배운 조선시대의 당파 싸움이 생각나고, 편가르기에 능숙한 이 시대가 더욱 혐오스럽게 느껴지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될 것입니다.

 

 

 

개별 학생과 개별 학생 간의 토의·토론, 개별 학생과 여러 학생 간의 토의·토론, 여러 학생과 여러 학생 간의 토의·토론, 개별 학생과 교사 간의 토의·토론, 여러 학생과 교사 간의 토의·토론, 그러한 형태가 얼마든지 얽히고 변화하는 토의·토론…… 토의·토론 학습은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삶의 생생한 장면 그대로의 토의·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입시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까? 대학 입학 시험이나 취직 시험이 교육을 해야 하는 목적이 분명하다면, 차라리 그런 시험을 토의·토론으로 치러야 할 것입니다. 시험은 5지 선다형으로 보게 하면서 말로만 토의·토론을 강조하면 위선(僞善)이 아니겠습니까?

 

간단한 소독만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랭보2는 누이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초등학교에서 쓸모없는 것만 가르치지 말고 제발 소독법 같은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답니다.3

그게 사실이라면 중·고등학교에서는 더욱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초등학교에서 무얼 얼마나 배우겠습니까?

 

벌써 "어리석은 생각 좀 그만두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인류문화유산을 잘 전달해야 하는 것은 교육의 일차적 목적이며, 따라서 학교란 교과서의 내용을 잘 전달하는 의무를 가진 곳이라는 설명입니다. "우선 내가 설명하는 것부터 잘 듣고 다른 생각을 하라!"는 말도 들립니다.

 

이 나라의 교육은 이렇게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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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베르 카뮈,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162쪽.이 부분에 대해 다른 번역은 얼마든지 있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이렇다.'대지(大地)의 영상들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할 때, 행복의 부름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질 때, 슬픔은 인간의 마음속에 싹트게 되는 것이다.'(이정림 옮김, 『시지프의 신화』범우사, 2011, 146쪽).
2. 아르튀르 랭보(Arthur Jean Nicolas Rimbaud 1854~1891) : 그는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1875년 문학을 단념하고 유럽 각지를 유랑하다가 1880년경 아프리카로 건너가더니 상인·대상들과 함께 돌아다니다가 다리의 종기가 덧나 프랑스 마르세유 병원에서 한쪽 다리를 자르고 몇 달 후 숨졌다(위키백과에서).

3. 이재룡「심장과 실핏줄」(『현대문학』2013년 2월호, 190~19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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