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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넌 이제 할머니하고 집에 있어!”

by 답설재 2013. 7. 25.

 

 

 

 

 

“넌 이제 할머니하고 집에 있어!”

 

 

 

 

 

  아주머니.

  저 그저께 아침에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입니다. 그때 두 자매를 데리고 제 앞자리에 앉으셨잖아요? 방학을 한 아이들이 따라나섰던 거죠?

 

  어디를 가는지, 버스에 오르자마자, 누나는 침착하게 앉아 있었지만, 남동생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얌전한 누나는 그런 동생을 흘낏거렸고, 동생은 몸을 흔들어대고 끊임없이 지껄이고…… 한껏 들떠서 버스 천장이라도 뚫고 올라갈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들이란 게 그렇지요. 별 데를 가는 것도 아닌데도 엄마와 함께라면 좋을 수밖에요. 모처럼 나들이에 구경꺼리가 생길 수도 있고, 친척이나 친지를 만나면 특별식을 먹게 될 수도 있고, 재수 좋으면 선물이나 용돈이 좀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선 '엄마와 함께'라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든지 즐거울 테니까요.

  다 끝난, 불가능한 일이어서 그렇겠지만, 저 같아도 단 한 번만 그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면, 글쎄요, 세상 어딘들―해수욕장, 설악산, 그런 곳 말고 진흙탕, 가시밭, 불구덩이라 하더라도―못 가겠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연방 좀 진중하라는 부탁을 하셔도 저는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자녀에게 행동거지에 대한 교육을 시키시는데 까짓거 좀 야단스러우면 어떻고 시끄러우면 어떻겠습니까. 그냥 방치하는 여느 부모들에 비해 그 모습이 구경하기에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대화를 무심코 듣고 있던 저는, 그 다음 말씀에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할머니하고 집에 있어!"

 

  "아니야!"

  아이는 돌연 당황한 표정으로 그 상황을 얼른 받아들이고 즉시 의사표현을 했지만, 아, 저는, 정말, 이걸,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암담할 뿐이었습니다.

 

  우선 댁에 계실 그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잠깐 그 할머니 입장이 되어보면서 눈물까지 글썽거릴 것 같았습니다.

 

 

 

 

  아주머니!

  정말이지 그건…… 할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는 것이 아이에게 주는 벌칙 같은 것이어서는…… 아, 저는 정말이지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렵고 두렵습니다. 어떤 이야기로, 어떻게 이 글을 마무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경우는 그렇습니다.

  둘째 딸이 낳은,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외손자가 곧 방학을 맞이하게 되고 우리 내외에게 와서 3박4일을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 기간은,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이 아이가 지난 겨울방학 이래 1학기 내내 기다려온 '여행'입니다. 말하자면 1학기를 잘 보낸 것에 대한 '선물' 같은 것으로, 매번 그 기간에 지킬 일을, 아마도 열 가지 이상으로 정해서 수첩 맨 앞에 쓰고 그걸 철저히 지키겠다고 제 어미와 굳게 약속하고 오는 것 같습니다.

 

  1. 절대로 떼를 쓰지 않는다.

  2.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3. 일기를 꼭 쓴다.

  4. 시키지 않아도 양치질을 한다.

  5.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린다.

  6. 귀여워하신다고 응석을 하거나 버릇없이 굴지 않는다.

  7. 게임은 허락을 받고 하루에 1회 30분 이내로 한다.

  …………………

 

  녀석이 그걸 잘 지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는 제게는 '선물'이고, 그러니까 저도 그 아이에게 그 아이보다는 훨씬 작지만 '선물 같은 것'이라도 되어야 하니까, 나중에 "우리 외할아버지는 내게는 그 누구보다 인자하게 대해주신 분"이라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그래야 녀석도 나중에 제 손자에게 그렇게 해줄테니까…… 어쨌든 저는 그 아이가 제 외할머니에게 떼를 쓰는지, 일찍 자는지, 일기를 쓰는지, 뭐 그따위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는 정말로 싫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는 적어도 그 아이 딱 한 명에게만이라도 좀 잘 보여서 나중에 제가 이 세상에 없게 된 어느 날,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써도 못할 사람이 왔다갔지" 하더라도 그 아이 한 명만은 "그렇지 않아! 그 누구보다 훌륭했어!" 해 준다면 저는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한 아이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아직 만 세 살이 되려면 몇 달 더 있어야 하는 손녀도 있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들여다볼 때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증명하려면 '이걸 어떻게 해야 내 눈에 넣어볼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를 눈에 넣는 일은, 과학적으로 아예 불가능합니까? 세상 일은 모두 과학적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까? 그럼, 과학 아닌 건 아무것도 없습니까?

  사실은 지금이라도 누가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저는 정말로 한번 시도해 볼 용의가 있습니다.

 

  이러한 '선물'이 지금 제게 두 명이나 주어진 것에 대해, 저는 제가 이 세상에 온 것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덧붙입니다. 이것들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쯤 '내가 도대체 왜 온 것이지?' 하고 의아해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잠깐씩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너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할머니하고 집에 있어!"

 

  아주머니!

  그 아이가, 그리고 그 아이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지켜본 그 아이의 누나가, 나중에 그들의 자녀에게, 바로 아주머니의 손자손녀에게 그런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얘는 그렇지 않을 거에요. 그럴 리 없어요."

  그러시고 싶겠지요.

  "우리 사이에는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가 어떻게 키웠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요.

  "설령 나중에 그런 일을 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 너무나 소중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그걸로 만족하고, 나중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나중에 좋은 대우를 받으려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아니지요."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지요. 두고봐야 하는, 아니 두고봐도 좋은 나중의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아주머니!

  그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여기는 사실이고, 그 나중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며, 그런 경우―집에 있어야 하는 할머니의 경우가 되면―섭섭해 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세월은 참 빨리 흐릅니다. 혹 '내일쯤' 아주머니가 '갑자기'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사실은 20~30년을 속은 것 같아서 몇 번이나 계산을 해봤습니다.

 

  심지어 전철을 타면 아직도 노인석 근방에도 가기 싫은 걸 억지로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왜 저 구질구질한 사람들, 냄새나는 사람들이 모여 앉은 노인석으로 가?'

  일반석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 아주머니는 아직 잘 모를 것 같습니다.

 

  곧 아시게 됩니다. 머지 않았습니다. 버스에서도 아름다운 청소년, 싱그러운 젊은이들의 옆자리에는 덥썩 앉기가 어려워집니다. 하루에 한두 번 꼭 샤워를 해도 그렇습니다. 한 번 겪어보시면 잘 알게 됩니다.

 

 

 

 

  아주머니!

  제가 아주머니에게 교육을 하려고 이 편지를 쓴 건 아닙니다. 어디 배우실 데가 없어서 이제와서 저에게 다 배우겠습니까?

  저는 다만 아주머니의 두 자녀에게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도록, 댁에 계신 그 할머니의 사랑을 순전히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대해 잘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주셔야 할 의무가 아주머니에게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사랑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올라와 공장에 다니는 어느 소녀가 그의 친구에게 한 말을 엿들은 일이 떠오릅니다.

  "난 그럴 수 없어…… 아빠엄마는 돌아가시고 없지만 시골에 계시는 우리 할머니 생각 하면 그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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