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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아베 총리에게

by 답설재 2013. 7. 18.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님.

대한민국 아산정책연구원이 주변국들에 대한 호감도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전국 성인 남녀 1000명 대상), 미국은 56.0%, 중국은 30.2%인 반면,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북한 9.1%를 약간 상회하는 겨우 14.4%인 것으로 나왔답니다.

또 앞으로 우리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에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응답은 60.1%로 유일하게 부정적 응답이 높았고 한·미, 한·중 관계는 절반을 훨씬 넘는 응답자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했답니다(각각 75.1%, 66.7%).1

 

이러한 경향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일본은 침략 근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답한다면 귀하는 당연하게 받아들일까, 섭섭해 할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귀국 일본, 특히 지도자들의 행태에 의한 현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나는 귀하의 견해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혹 귀하의 선대, 선조들이 귀하와 같은 생각을 가졌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것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2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견해의 사례를 보겠습니다.3

귀하는 지난 3일, 일본 기자클럽 주최로 열린 당대표 토론회에서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했는지를 묻자―이걸 묻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 지배 또는 침략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정치가가 아닌 역사가에게 (판단을) 맡겨야 한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나는 판단을 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를 정의할 입장이 아니며 (정치가가) 역사를 정의하는 것은 겸허하지 않다."

 

귀하는 또 2차 세계대전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를 위한 것"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알링턴 국립묘지에 참배하는 것이 남군의 노예제 유지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듯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습니다.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귀하는 지난 4월 의회 답변에서도 사실상 일본의 침략을 부인하는 발언을 해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을 것입니다. 다만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 '종군 위안부' '신사 참배' 등에 대한 귀하의 견해가 귀하가 말한 것과 일치한다고 믿을 수가 없을 뿐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겠습니까?

 

번역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니면 귀국과 우리는 문화가 많이 달라서 같은 말이라도 서로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입니까?

제대로 전달된 것이 분명하다면 무엇보다 일본의 교육이 그렇게까지 허망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어서 어의가 없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일국의 총리께서 '침략'이 뭔지 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자위대를 지휘할 수 있습니까?

 

역사는 역사가가 기록해가는 거야 누가 모릅니까? 그거야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가령 "임진왜란을 일으킨 나라는?" "그때 왜적을 무찌르는 데 가장 큰 업적을 쌓고 실제적으로 왜적이 물러가게 한 조선의 장군은 누구인가?"와 같은, 깊이 생각하고 따지고 할 것도 없는 단순한 사실까지 역사가에게 맡겨서 대답하게 해야 한다면 역사 교육 자체가 불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야기할까요? 초등학생에게 "얘들아,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물으면 아이들이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글쎄요, 우리는 뭐 '침략'이 뭔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침략을 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디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럴까요? 그러면 제대로 된 아이들일까요?

 

일본도 그렇게 하지는 않잖습니까? 일본의 교사들은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말합니까? "침략이 뭔지는 역사가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 너희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일본에 대해 교육 좀 제대로 하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설마 일본이 그 따위 교육을 하지는 않는다는 걸 장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귀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귀하도 그걸 뻔히 다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인들은 멀쩡하다가도 지도자의 위치에 앉게 되면 옳고그름에 대한 판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밖에 할 수가 없고, 결코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미래를 향해 발전적인 일을 하자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귀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정부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 기념비를 설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비판했습니다. 지난 5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인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이라며 (한·일이) 상호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도무지 말이나 되는 건지 의심스럽지만 단순하게 묻겠습니다. 역사는 역사가에게 맡기자면서요? 그가 위대한 인물인지, 조선통감(1906~1909)을 지내는 등 한국 식민지 지배를 주도한, 우리에게는 원한이 사무치는 인물인지는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들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진을 한 장 보여주겠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것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이번엔 또 파이낸셜타임스를 비판할까 싶기도 했습니다.

사진을 실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4

 

영국의 유력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한국 법원이 지난 10일 한국인들을 강제징용했던 일본기업들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라고 내린 판결을 '역사적 판결(landmark ruling)'이라고 평가하고,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제징용 피해자의 사진을 11일자 아시아판 3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후략)…

 

기사의 사진에는 "1944년 미야지마 신사를 방문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인터넷 캡처·후카가와 무네토시 촬영'이라는 출처가 붙어 있습니다.

 

 

 

 

 

 

 

아베 총리님.

귀하가 지난번에 총리가 되었을 때 순진한 우리 언론에서는 "순박하고 스마트하게 보인다"고 했고, FM 방송 DJ 등 경력이 화려하고 '겨울연가'를 보고 몇 마디 한국어를 배웠다는 귀하의 부인이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기사도 실었습니다.

 

나로 말하면, 귀하가 '아름다운 나라 일본'의 기치를 내걸고 “세계 모든 나라로부터 존경받는 아름다운 일본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을 때, 그 기사를 읽는 순간 문면 그대로 해석하면서 얼마나 가슴벅찬 느낌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아! 이젠 일본을 믿을 수 있겠구나!'

'우리는 이제 서로 잘 지낼 수 있겠구나!'

 

그 '아름다운 나라'가 사실은 '강력한 나라 일본'을 의미하는 줄도 몰랐고, '헌법'과 '교육기본법' 개정을 전략으로 하여 경제력에 걸맞은 군사력을 갖추어 국제사회에서 상응하는 발언권을 인정받고, 일본의 역사를 부정적으로(사실은 제대로) 묘사하는 기존 역사관을 뒤집겠다는 것이 그 의도인 줄도 몰랐던 것입니다.

 

귀하가 "편협한 내셔널리즘은 국기를 흔들고 국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국기를 불태우고 찢는 것이다. 일본은 그런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 때 귀하의 그 지적이 우리와 중국을 향한 것인 줄도 몰랐습니다.

 

극동연구가 헨리 노먼Henry Norman이,5 일본이 동양의 다른 나라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 낸 명예에 관한 규칙들 중 가장 엄격하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정확한 것이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고 한 글을 읽을 때도 다 옛날의 일본 이야기인 줄 알았지, 오늘날에 와서도 침략에 대한 반성이고 뭐고 '명예회복'이 우선이라는 듯한 논리와 발언을 일삼을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아베 총리님!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 '진출(進出, 침략)'해보지 못한 역사를 한탄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이웃나라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귀하도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가슴속의 진정한 생각을 그대로 표현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나는 귀하가 침략이 뭔지에 대해 우리만큼 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귀하는 엄연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일본의 총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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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일보, 2013.7.11, 6면, ['호감'...美56%-中 30%-日 14%-北 9%]
2. 아베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열렬한 신봉자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이고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의 아들이다.
3. 조선일보, 2013.7.4, A18, ['韓中 침략 여부 역사가가 판단해야, 식민지 지배 안했다고 말한 적 없다'] 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날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 공약집에; '영토, 주권, 역사 문제에 관한 연구기관 신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자민당은 공약집에서 '각종 전후(戰後) 보상재판과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 등에서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부당한 주장이 공공연해져 일본의 명예가 현저히 손상되고 있다'면서 '새로운 기관의 연구를 활용해서 적확한 반론과 반증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선거공약집에는 이른바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의 날' 행사 개최를 검토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4. 조선일보, 2013.7.12, A12, [英 신문이 공개한 강제징용 한국인 피해자 단체사진].
5. 니토베 이나조, 양경미·권만규 역, 『사무라이』, 생각의나무, 2004, 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