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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다시 아베 총리에게

by 답설재 2013. 7. 23.

 

미국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위안부 기림비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이번에 '대승'을 거둔 참의원 선거 때문에 바빠서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까?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건립되었고, 버겐카운티 법원 앞의 '메모리얼 아일랜드에 홀로코스트, 아르메니아 대학살, 아일랜드 대기근 사망 등 세계 인권 침해 사건 추모비와 함께 세워져 있답니다.

 

그 기림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졌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귀국에서 찾고 있는 "우리가 그렇게 한 증거를 대라!"고 할 때의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성노예 생활(sexual slavery)을 강요당한 한국과 중국, 대만, 필리핀,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출신의 수십만 여성과 소녀들을 추모하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86) 할머니는 7월 15일, 그 기림비를 찾아가서 15세에 끌려가 3년간 위안소에서 겪은 고통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답니다.1

"위안소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도살장이었다."

"위안소에서 탈출하다 잡혀 칼질까지 당했고 죽지도 못했다."

이옥선 할머니는 또 이렇게 당부했답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인물이 귀국에서 찾는 바로 그 '증거'입니다. 무얼 더 원합니까? 문서로 된 증거를 찾습니까? 그 당시 문서는 일본인들이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증거를 찾아서 무엇에 쓰려는 것입니까? 우리더러 당시의 일본인들이 만든 그 문서대로 판단하자는 것은 아니겠지요?

더 정직하고 생생한 자료, 증거가 저 이옥선 할머니가 아닙니까? 꼭 이렇게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와서 증거를 대라는 것은, 그 어떤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려는 의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게 어디 몇백 년이 지나서 가물가물한 일입니까? 증거라니요?

알랭 레네의 「밤의 안개」에 대해 들어보았습니까?2

 

거의 60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지금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다큐멘타리 중 하나이며 홀로코스트를 다룬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레네 역시 홀로코스트의 재연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예민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 어떤 이미지와 설명으로도 집단수용소의 잔혹성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며, 따라서 완벽한 재연은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지 얼마 안 되는 과거의 흔적에 불과하다. 과거를 기억해야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고민이 이 영화의 기저에 녹아 있다. 과연 과거의 집단수용소를 어떻게 기억하고 또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묻고 싶습니다. 증거를 찾아서 무엇에 쓰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입니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려는 것입니까?

분명히 인식할 것이 있습니다. 저 평론은 홀로코스트의 증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역사적 진실은 바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귀하는 일본인으로서의 '명예'를 존중받고 싶은 만큼 역사적 책임도 다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위의 인용문에서 적절한 구절을 보여주겠습니다.3

 

우리는 그 시대 그 장소에 있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책임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또 다른 사악한 힘이 발동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 역시 추궁을 당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기억해야 할 책임, 학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왜 그런가? 수용소를 만든 그 '악의 능력'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4

일본은 아직 인정하고 싶은 증거가 없어서 우리를 침략한 사실을 '진출(進出)'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독일은 명백한 그 '증거' 때문에 이런 시를 보고도 아무 말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보들 같으니라고…… 증거가 다 드러나도록 그냥 두는 순진한 독일 사람들…… 주변의 여러 나라로 "진출"했다고 하면 되지 않나?'

 

 

70

 

히틀러는 지옥에서

어떤 강제노동을 할까?

 

벽에 페인트칠을 할까 아니면 시체를 다룰까?

그는 사자(死者)의 냄새를 맡을까?

 

거기서 그에게 수없이 태워 죽인

아이들의 재를 먹일까?

 

아니면, 그가 죽은 이래, 그들은 그에게

깔때기로 마시는 피를 줄까?

 

아니면 뽑아낸 금이빨들을

그의 입에 두드려 박을까?

 

 

71

 

혹은 그의 미늘 달린 철사

위에 눕혀 잠을 재울까?

 

혹은 지옥의 램프용으로

그의 피부에 문신을 할까?

 

혹은 불의 검은 마스티프*가

무자비하게 그를 물어뜯을까?

 

혹은 그의 죄수들과 함께 밤낮

쉬지 않고 여행을 할까?

 

혹은 영원이 가스 속에서

죽지 않은 채 죽어 있을 것인가?

 

 

* 사나운 개

 

 

 

주한 일본대사관 앞 도로변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

1. 문화일보, 2013.7.16, 29면, ['일본군 위안소는 사람사는 곳 아닌 도살장이었다']이 할머니가 그 기림비를 찾아 헌화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려면 연합뉴스 위안부 피해 이옥선 할머니, 미국 버겐카운티 기림비 방문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됩니다. [위안부 피해 이옥선 할머니, 미국 버겐카운티 기림비 방문] (2013.07.16 05:34).
2. Alain Resnais, 「Nuit et Brouillard」, 1955, 35분. 우리나라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다.(『현대문학』2013년 1월호, 358쪽, 주경철 역사산책 제8회 「밤과 안개: 홀로코스트, 이미지, 기억」의 각주.) 이 인용문의 출처는 위의 책 358쪽임.
3. 위의 책, 위의 글, 361~362쪽.
4.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정현종 옮김, 문학동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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