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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들이의 자유로움과 그 실체

by 답설재 2013. 5. 24.

 

 

 

 

 

나들이의 자유로움과 그 실체

 

 

 

 

 

 

 

  기차를 타는 시간은 즐겁습니다. 그 즐거움 때문에, 그 즐거움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려고 웬만하면 좋은 좌석의 비싼 표를 구입합니다. 게다가 그 즐거운 시간에 해야 할 일들은 늘 많습니다.

 

  경상북도교육청에서 교과서 심사를 할 교수, 교원들에게 그 요령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오가는 길에 읽을 책을 고르고, 생각나는 것들을 메모하고 그 메모를 정리할 주제를 충분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몇 시간에 할 일을 좀 '헐렁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늘 '충분하게' '빽빽하게' 마련합니다.

  어쩌면 이런 기대 때문에 그런 나들이가 즐거운 건지도 모릅니다.

 

 

 

 

  요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많이 자유롭게 됩니다.

 

  아내는 허술하게 먹지 말라고 부탁하지만,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건성으로 대답하고, 한 끼는 꼭 샌드위치 종류와 커피로 떼웁니다. 평생 정기진료를 받게 된 주제에 그런 것들은 몸에 좋지 않다는 건 잘 알지만, 그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식품이고, 자주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쩌다가 한 번'이라는 핑계를 만들어 그를 속입니다.

 

  그날도 저녁은 연어비빔밥(값이 싸기도 하지만, 연어 색깔 비슷한 당근 조각이 눈을 속이는 '혼란스런 연어비빔밥')을 먹었지만, 서울역 '파리크로아상'이라는 가게에서 샌드위치 'BLT오리지널'과 거피 한 잔을 구입해서 점심으로 먹었습니다. 그런 점심은 '먹으며 읽기'에도 편리합니다. 더구나 적절한 식당을 찾아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어서 그렇게 간편한 요기를 하는 것은 이래저래 좋은 방법입니다.

 

 

 

 

  책은 늘 읽고 싶은 만큼 읽지 못하는 걸 그 기회에 보충하고 싶어져서 준비하고, 메모 준비는,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보다는 일단 시내에서든 지방 나들이든 기차를 타면 생각이 줄을 잇기 때문입니다. 신문만 해도, 기차 안에서 읽으면 집이나 사무실에서보다는 이것저것 메모해 두고 싶은 것들이 더 많은 걸 보면 그런 시간에 머리나 가슴이 더 많이 열리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런 나들이를 할 때에도 나는 평소처럼 작은 스포츠가방을 꼭 가지고 다닙니다. 준비물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스포츠가방은, 언제 어디서든 넣고 싶은 것을 '쑥' 집어넣거나 꺼낼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 가방은, 사실은 단 몇 시간짜리 나들이를 두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욕심을 부추긴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빈손으로 다니면 욕심을 덜 내거나 누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나들이 시간의 활용 결과는 보나마나 뻔합니다. 단 한 번도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 해본 적이 없어서 언제나 스스로를 책망하게 됩니다.

 

  '내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뭘 하나 제대로 하는가.'

  '차를 타자마자 처음부터 끝까지 책이나 열심히 읽을 걸……'

  '꼭 해야 할 일부터 하고,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었어도 좋았을 텐데, 그래야 하는 건데……'

  '내가 욕심을 너무 부렸지. 다음부터는 좀 가볍게 다니도록 해야지.'

 

  그러다가 요즘은 그렇게까지 자책을 하거나 한탄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해 그 후로도 나들이만 하게 되면 늘 그와 같은 욕심을 냈고, 그것은 어쩌면 그런 나들이 시간을 즐기는 내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내가 이런 나들이를 그만큼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그만큼 좋아해서 기대를 많이, 크게 가지는 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자유로운 시간, 여유로운 시간에 대한 내 기대가 커서 그런 거니까 좀 봐줄 만한 것 아니겠어?' 

 

 

 

 

  그날도 결국 책은 조금밖에 읽지 못했습니다. 우선 자리에 앉자마자 좌석 앞 주머니에 꽂혀 있는 여러 가지 읽을거리부터 훑어보았고, 그러는 시간이 잘 흘러갔습니다.

  신문도 집에서는 시간에 쫓겨서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보기 마련이지만, 그날은 두 가지를 꼼꼼하게 다 읽었고 스크랩하거나 메모할 것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이 오죽 많이 걸렸겠습니까.

 

  이래저래 시간은 다 흘러갔고, 한 가지 예상 외의 소득이 있었다면 『공감』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아래의 광고를 본 것입니다.

 

 

 

 

 

 

 

  나는 그날 이 광고를 한참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한 달에 만원 정도 후원금을 보내는 일은 간단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자동인출' 신청을 해두면,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을 갖기는커녕 설령 아주 악독한 마음으로 지내더라도 후원금이 저절로 빠져나가게 되니까 그런 경우에는 아주 우스운 결과가 빚어지게 됩니다.

 

  오래 전에, 그렇게 내 헌금을 자동인출해 가는 어느 기관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헌금을 더 내지 않아도 좋으니까 특정 대상에게 보내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고, 그렇게 결정하기 전에 그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곧 정말로 그 자료가 우송되어 왔고, 그걸 펼쳐본 나는 망연자실했습니다.

 

  그 인물은 내가 그려봤던 인물은 전혀 아니었고, 도저히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물이어서 그랬느냐고 물으면, 솔직하게 말해서, 당시의 내 기대라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그저 최소한 '정상인'을 그려보며 기다린 것이 분명했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이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인지도 모르는데── 그 사진에는 1급 장애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평소에 동정어린 마음으로 잡지나 신문에서 얼마든지 찾아 읽을 수 있는 불우한 사람으로서의 사정도 기록되어 있었는데, 나로서는 그것조차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그 자료를 반송했습니다. 아마 구구하고 구차한 변명도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나는 자신의 그 경솔함의 속죄를 위해 지금도 그 후원금을 내고 있습니다. 아니, "내고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내 통장을 관리할 수 없는 사정이 되는 그날까지, 자동인출이 그대로 계속되도록 그냥둘 것입니다. 그것으로 속죄가 될 지는 모르겠고 구태여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재단에서 감사의 연락이 올 때마다 "우편물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이런 전화 하시지 않아도 좋겠다"고 하고, "몇 푼 되지도 않아서 정말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아, 낯두껍게도 이런 얘기를 다 쓰다니……

  그렇지만 이번 나들이에서 다시 한번 그때의 잘못을 되새기고, 어디 작은 돈이지만 후원금을 보낼 수 있는 곳을 한 곳이라도 더 정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겸연쩍지만 그 나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해두겠습니다.

 

 

 

  P.S. "…… 봄나들이 갑니다."로 끝나는 동요가 있습니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아이가 묻습니다. "선생님, '봄나'가 뭐예요?" 선생님이 생각합니다. '봄나…… 무슨 그런 단어가 있나?' 그 순간 다른 짜증나는 일이 생각났거나, 혹은 조급한 느낌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대답해버렸습니다.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도록!"

  '봄나'가 뭔지 아십니까? '봄나'의 복수격은 '봄나들'입니다. 여러 '봄나'가 '봄나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리 나리" 하다가 "개나리"가 되니까 "봄나" "봄나" 하다가 "봄나들"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이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들이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난 일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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