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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기분 풀고 가세요 - BEARD PAPA

by 답설재 2013. 6. 4.

 

 

 

 

 

“기분 풀고 가세요.”

BEARD PAPA

 

 

 

 

 

 

 

  모처럼의 나들이였습니다. 편도로 겨우 두어 시간 운전에 이렇게 퍼지는 걸 보면 이런 나들이도 이제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려가는 길의 마장휴게소에서 아내가 찾던 CD를 사주었습니다. 마땅한 음반 두 개를 샀는데 열어보니까 CD가 각각 두 장씩이어서 횡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하는 일들이 이렇게 풀리면 오죽 좋겠습니까.

 

 

 

 

  아내에게 커피를 사가지고 출발하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습니다.

  큰돈 드는 게 아니니까 이런 거라도 고급을 마시겠다는 평소 생각대로 지난번에 혼자 내려갈 때 들렀던 그 커피숍에 들어가서 주문을 했는데, 계산대의 총각이 거스름돈을 내주고는 커피를 빼고 있는 점장(아니면, 요즘 용어로 '바리스타')을 향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누나, 잔돈이 하나도 없어요."

  점장은 총각에게 만 원을 쥐어주며 편의점에 가면 바꿔준다고 했습니다.

 

  총각이 나가자, 점장이 주문까지 받게 되었는데 마침 서너 명의 손님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점장은 아예 커피 빼는 일은 팽개쳐 놓고 '주문만' 받을 자세였습니다. 사실은 '주문부터' 받겠다는 뜻이었을 것인데, 나는 그게 못마땅했습니다.

  "저―, 커피 주세요."

  "저에게 말씀하세요."

  "? …… 커피 달라니까요?"

  "그러니까 저에게 말씀하세요!"

  그때까지 나는 그 점장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고, 점장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님들로부터 돈을 받는데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는 느낌? 늙은이라고 우선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같은 돈을 지불한다면 최소한 동등한 대우는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치솟았습니다. 말하자면 그 점장은 내가 주문한 뒤에 들어온 20~40대 젊은이들을 우선적으로 상대하고 이미 주문을 마친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말이지 나는 노인 취급 받는 걸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둘이서 식당 같은 데 가보면 업체에 따라서는 같은 돈을 내는데도 젊은이들에게 더 친절하고, 신경을 쓰고 ―그들은 그 가게에 나보다 더 오래 드나들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심지어 품질이 더 좋은 음식을 내주는 걸 발견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집에는 내 주머니의 돈이 썩어 나간다 해도 다시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이보세요!"

  그렇게 언성을 높여 말을 이어갔습니다.

  "주문을 했으면 됐지! 커피 달라는 말을 별도로 또 해야 합니까? 주문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이거야 원!"

  그제서야 그 점장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그 점장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 것은, 내 목소리가 너무 크고 말한 내용도 과격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순간적으로 이미 내친 길이니까 더 나가버리자고 작정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말을 시작하면서 손바닥으로 카운터를 한번 내려쳤더니, 거기에 얹혀 있던 모든 것들이 '소스라쳐 놀라' 제각기 소리를 냈기 때문에 그 가게에 들어와 있던 사람들도 모두 놀란 눈치였습니다.

  "(카운터를 내려치며) 아니! 커피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설명을 하자니까 이렇지, 사실은 거기까지는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주문을 하시지 않은 줄 알고……"

  그 뒤의 일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이 사람이 착각했구나!'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져 있어서 "그러셨어요? 착각하셨어요? 그렇다면 뭐……." 하고 얼버무릴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기분 풀고 가세요."

  점장이 커피를 내주며 그렇게 달래주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물을 좀 타야 할지 그냥 마셔도 될지 뚜껑을 열어 커피맛을 보고는 휭하니 돌아나왔습니다.

 

 

 

 

  이렇습니다. 내가 이렇게 유치합니다.

  아내를 찾아서 자동차를 타면서 이미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공연히 소리를 질렀지?'

  '그 점장이 노인이라고 무시하거나 소홀한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손님들이 우루루 들어오면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돈부터 받고 싶을 것이 당연하지……'

  '결과적으로 내가 "기분 풀고 가라"는 그 점장보다 못하다는 뜻이잖아. 지금쯤 나를 옹졸한 인간이라고, 생긴대로 논다고 이야기하고 있겠지.'

  '그렇다고 그 가게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펴볼 수도 없고…….'

  '아내가 노래하듯 부탁하는 것이 "마음을 곱게 가지라"는 건데…….'

  '죽기 전 몇 년, 아니 몇 달 동안이나 아내의 그 부탁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는 오늘 이 순간 또 새로 출발해야 하는 거지?'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은 카드는 딱 한 장. 아내에게 신고하는 것, 그리고 새 출발을 하는 것.

  아, 나는 새 출발만 하다가 말 인간입니다.

  "저― 여보, 그 가게에서 한바탕 하고 왔어……."

  "어쩐지…… 좀 오래 걸린다 했더니……"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짤막한 평가를 하고 말았습니다. 혼잣말 같은 그 대답을 듣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 새출발을 확실하게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그 '새출발'이 어디 한두 번이라야 하지, 작심삼일이라더니 나 원……

 

 

 

 

  그 점장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그는 점장다웠으므로 언젠가 꼭 정식으로 사과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그분이 그 가게에서 근무하면 좋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나처럼 그곳을 지나가다가 커피를 사 마시는 사람에게 내가 정말 미안해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니 그 가게 이름은 BEARD PAPA입니다. BEARD PAPA…… 들어가보면 진짜로 아늑하고 좋은 곳입니다.

 

  서예에 능한 어느 여류의 습작들을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제목과 시, 번역문의 순으로 정갈하게 쓴 것을 축소 복사한 것 같았고, 한결같이 단정한 글씨였습니다. 그걸 누가 한 장 한 장 정성들여 모으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꿈이었습니다.

  그런 고운 꿈을 꾸었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