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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고추잠자리'(조용필)에 대하여

by 답설재 2013. 6. 7.

 

 

 

 

무대에서 내려서면 시지몽은 더이상 대수로울 게 없다. 두 시간 후엔 그가 밖에서 식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을 일러 인생은 하나의 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지몽 뒤에 또다른 사람이 온다. …(중략)… 이렇게 수많은 세기들과 수많은 정신들을 휩쓸고 자신이 될 수 있는 혹은 자신이기도 한 사람을 흉내냄으로써, 배우는 그 다른 부조리한 인간인 나그네와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된다. 나그네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엇인가를 소모시키면서 끊임없이 움직여 나아간다. 그는 시간 속의 나그네이며, 그것도 잘해봤자 영혼들에게 추적당하면서 쫓기는 나그네인 것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살하기보다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렇게 썼다.*

배우는 덧없는 시간, 덧없는 명성 속에서 그에게 허용된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지만 배우로서의 그의 열정, 그의 삶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막아설 수 없는 것이다.

 

 

 

 

조용필 뉴스를 보며 우리는 함께 감탄했다.

"아, 조용필……"

그것은 거의 같은 연령대의 연예인이 '살아 있음'에 대한 위안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를 위해서인지, 그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 때문인지, 혹은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을 내가 실제보다 더 크게 보고 있기 때문인지 이즈음 다른 가수들이 비교적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그 젊은 시절, 그의 LP판도 구입했지만 그걸 한번 들어보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굳이 LP판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아서 테이프도 몇 개 샀고 우리는 그것들도 들어봤는지 의식하지 않고 지내다가 없애버렸다.

그것이 우리의 세월이었지만 그는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에는 『Hello』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그는 또 나와 어떤 점이 다른가?

나는 교육자로서 '교육'만 생각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혹은 하고 싶지 않은 많은 일들을 했고,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하지 못했다.

그는 어떤 일들을 했을까?

 

그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혹은 하고 싶지 않은 많은 일들을 했고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하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의 '노래처럼' 살려고 한 것 아닐까?

'노래처럼'? 그것은 나와 그의 일을 비교하여 분명해지는 '노래처럼'이다.

노래처럼 연극처럼 시처럼 영화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맡았던 배역들에 취하여 아주 우스운 사람이 되어버린 경우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어느 노래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동백섬의 동백(冬栢)처럼?

'창밖의 여자'처럼?

'한오백년'처럼?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나는 그가 '고추잠자리'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자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그 가사처럼 그 멜로디처럼……

그가 가장 좋아할 노래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어한다.

 

내가 그로부터 받아온 것이 있다면 그가 바로 그 '고추잠자리'처럼 살아온 것에서 비롯되는 정서이며 만약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드리엔느 르꾸브뢰르(Adrienne Lecouvreur 1692~1730, 프랑스의 비극 여배우)는 임종의 자리에서 기꺼이 고해를 하고 성체 배수를 하려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직업을 버리길 단호히 거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고해의 덕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결국 신(神)보다는 차라리 빨아들일 듯한 자신의 열정을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임종의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 자신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길 눈물로써 거절하는 이 여인에게는, 그녀가 결코 조명 앞에서는 얻지 못하는 어떤 위대함의 자취가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가장 멋진 역이었고, 또한 연기해 내기 가장 힘든 역이었다. 천국과 어떤 엉뚱한 성실성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 영원보다는 혹은 신(神)에게 몰입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연기해야만 하는 먼 옛날부터의 비극인 것이다.

 

까뮈는 배우의 삶을 이렇게 요약해주었다.**

 

 

 

 

가령 베토벤처럼 모차르트처럼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로댕, 고흐, 미켈란젤로처럼, '교과서적'인 인물이 한 마디로 멋진 인물이라면 그 인물은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간 인물이어야 한다.

 

교과서에 실었을 때 그가 아직 생존인물이라면 그 교과서를 쓴 학자나 교원이 '이 사람이 무슨 엉뚱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까?' 불안을 느낀다면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그게 참 어려운 일이어서 교과서에 실렸다고 해서 집 안에 들어앉아 벽만 쳐다보고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긴 하다.

그렇다면 생존인물을 교과서에 실어주는 것은 그를 옥죄는 일이 된다. 사실은 연예인들의 생활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조용필은 언론에서 (   ) 안에 자신의 나이를 표시하는 걸 우스개삼아 이야기했다. 살다보니까 나이가 들어 있고 그래서 나이를 잊고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아니 수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다만 누구에게나 어떻게 사느냐가 과제가 되는 것이다.

 

 

 

 

그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려나 싶어서 하필이면 '교과서'를 생각해본 것이다.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든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공연히 나와 상관도 없는 조용필의 그 '오빠부대'를 눈물겨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Hello"나 "Bounce"의 조용필보다는 '고추잠자리'를 부르는 조용필을 훨씬 좋아한다. 그리워한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싶지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울고싶지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따러 왔다가 잠든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구름만

흘러가고

어지럼 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싶지

랄라라 라라라

랄라라 랄랄라

랄라라 라라랄

랄라라 랄랄라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따러 왔다가 잠든날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외로움 젖은 마음으로

하늘을 보면 흰구름만

흘러가고

어지럼 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싶지

뚜뚜뚜뚜뚜뚜

뚜뚜뚜

뚜뚜뚜뚜뚜 뚜뚜뚜뚜

우 뚜뚜뚜

뚜뚜뚜뚜 뚜뚜뚜뚜뚜

뚜뚜뚜뚜 뚜뚜뚜뚜

뚜뚜뚜뚜 뚜뚜뚜뚜

뚜뚜뚜뚜

뚜뚜 뚜뚜뚜뚜뚜 뚜뚜뚜

 

― '뮤직 마스터'가 'DAUM 뮤직'에 등록한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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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의 신화』(육문사, 1993), 107~108쪽.
** 위의 책, 위에서 인용한 글의 두 페이지쯤 뒤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