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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심판』

by 답설재 2013. 1. 20.

프란츠 카프카 『심판』

추지영 옮김, 혜원, 2006

 

 

 

 

 

 

"카프카의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다시 읽게 한다." 알베르 까뮈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읽어야 하는 그 일이 읽는 사람을 따분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어차피' 독자로 태어난 저 같은 경우는 아무리 욕심을 내고 부단한 노력을 한다 해도 '어차피' 세상의 모든 소설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두 번 읽는 책이 있다고 해서 한심해지거나 아득한 느낌을 가질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의 책은 읽을 때마다 이미 읽었던 소설이기 때문에 따분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께름칙한 느낌을 주는 것이 참 야릇합니다.

어느날 새벽, 등장인물이 거대한 한 마리의 벌레로 바뀌어, 그것도 바로 그들 때문에 돈을 벌어들이려고 온갖 고생을 한 바로 그 가족들의 냉대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거둔다는 참 허무맹랑한 얘기, 『변신』만 하더라도, 그 소재가 실제로는 있을 리 없고("사람이 어떻게 벌레로 변하나!"), 차근차근 따져보면 우화적인 요소가 다분하고, 그래도 혹이나 싶어서 주변의 누구에게 그럴 수도 있는지 물어본다면 "그런 것까지 걱정할 정도로 할일이 없으면 낮잠이나 자라"고 하거나 참 하릴없는 인간이라고 혀를 찰 것이 분명한데도, 아니 우선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과학적 상식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초등학생 수준만 된다 해도 불가능한 '변신'이라는 건 곧 판명될 것이 확실한데도, 그 소설을 읽고 있을 때는 흡사 그 불운한 얘기들이 실제 상황인 것 같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을 것 같고,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 내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지고, 심지어 몸 어느 곳이 스물스물하여 그곳이 별일 없는지 한번 만져봐야 속이 시원한 느낌일 정도로 께름칙했었는데, 이 작품 『심판』 또한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이지요. 저도 압니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아직도 민주화가 덜 됐니 어쩌니 하지만, 이 소설 『심판』의 요제프 K.처럼 확실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혐의로 구속되고, 그 혐의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그 터무니없는 선고에 따라 어처구니없는 방법으로 처형되는 불운을 당할 까닭은 추호도 없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쯤은 저도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은 진실만을 이야기한 소설이 분명합니다.

 

 

 

줄거리입니다.

첫 페이지부터 당장 체포되는 장면이고, 이후의 전개는, 그러므로 소설 전체가 요제프 K.가 혐의를 벗어보려고 노력하는 일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알베르 까뮈는 "얼핏 볼 때엔, 그리고 일반 독자에게는, 그의 작품들은, 덜덜 떨면서도 끈질긴 그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그들이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문제들을 추적케 하는 불안스런 모험들로 보일 것"이라고 하면서 이 소설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걸 외면하고 나름대로 줄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 그대로 옮깁니다.

 

『심판』에서 요제프 K.는 고소를 당한다. 그러나 그는 무슨 죄목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기어이 자기 자신을 변호하려 열심이지만,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변호사들은 그의 소송 사건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사랑하고 먹고 혹은 신문 보는 일 따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윽고 그는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나 법정은 아주 어둡다. 그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다만 자기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거라고 추측할 뿐, 그것이 어떤 선고일까는 거의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때때로 그래도 의혹을 품긴 하지만, 그는 계속 살아간다. 얼마 후, 단정한 옷차림의 정중한 두 신사가 그를 데리러 와서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청한다. 아주 정중하게 그들은 그를 어느 음침한 교외로 끌고 가, 그의 머리를 돌에 짓찧고 그의 목을 벤다. 죽기 전에, 이 선고받은 사람은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개 같이」라고.1

 

 

 

 

아마도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위의 줄거리를 읽고도 '그래도 소설의 어디엔가 고소를 당한 이유가 대충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겠지만, 그걸 분명히 해보기 위해 그야말로 눈닦고 읽어봐도 보이지 않았고, '아, 형사사건이구나!' 싶게 하는, 겨우 다음과 같은 부분이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그럼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살다 보면 별일을 다 당하니까요. 선생님이 먼저 얘기를 꺼냈으니까 저도 말씀드리겠어요. 사실 저도 문 뒤에 숨어서 조금 엿듣기도 했고, 감시인들이 대충 얘기도 해 주더군요. 주제넘게 하숙집 주인이 별걸 다 참견한다고 하시겠지만 선생님 일은 제 일처럼 걱정이 된답니다. 감시인에게 얼핏 들은 말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더군요. 도둑질로 잡힌 것과는 많이 다르니까요. 선생님의 경우는 뭐랄까, 학문과 관련된 일이라고 할까요? 제가 표현은 잘 못하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하지만 저는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에요."(23)

 

아! 요제프 K.라는 한 교수가 이념적인 글을 써서 형사사건에 연루된 건가? 한다면, 그는 그런 일과는 전혀 무관하고 관심도 없는 한 은행원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자칫하면 아무나 걸려들 수 있는 것'이라는 인상을 남긴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막상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떤 상황이 되겠습니까? 당한 사람은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나가겠습니까? 법원에 나가는 시간 외에는 평소와 거의 다르지 않은 나날이 전개되지 않을까요? 비록 마음은 실이 엉기듯 차츰 엉망이 되어 간다 하더라도……

위의 줄거리 소개에서 까뮈가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사랑하고 먹고 혹은 신문 보는 일 따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한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지루한 얘기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 주는 사람은 언제나 레니였다. 눈치 빠른 그녀는 변호사가 열을 올려 얘기할 때면 차를 가져왔다. 그리고 K의 등 뒤에 서서 변호사가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마시는 동안 K의 손을 살짝 잡았다. 변호사는 차를 마시고, K는 레니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레니는 재빨리 K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변호사는 차를 다 마시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직도 거기에 있었나?"

"찻잔을 가지고 나가려고요."

레니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나갈 때 다시 한번 k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변호사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면서 다시 설교를 시작했다. 변호사는 위로를 하려는 건지 아니면 절망을 안겨 주려는 것인지 K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확실했다.(112~113쪽)

 

이처럼 일상적인 얘기, 하나도 공허하지 않은 얘기,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우리가 듣고 만나는 변호사들 중 한두 명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세히 묘사된 그 이야기들이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줍니다.

 

 

 

 

곳곳에 '아, 법률이란 이런 거구나!' '법조인들이란 정말로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 맞아! 사건이 생기면 이럴 것 같구나!' …… 싶은 대화가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요제프 K.는 예심판사 앞에서 다음과 같은, 쓸데없는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이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씀드린다면 거대한 어떤 조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조직은 매수하기 쉬운 감시인이나 우둔한 감독, 또 다행히도 겸손한 예심 판사를 고용하고 있습니다만, 더 나아가서는 각급 지위를 가진 재판관과 급사, 서기, 경찰, 심지어는 사형 집행인까지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조직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무고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터무니없는 재판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이 엉터리인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감시인은 체포된 사람들의 옷이나 뺴앗으려 하고, 감독은 남의 집을 침입합니다. 무고하게 체포된 사람은 심문을 당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받는 꼴입니다. 감시인들은 체포된 사람들의 소지품이 보관된 창고에 대해서 설명을 늘어놓았는데, 저는 솔직히 그 창고를 한번 보고 싶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의 개인 재산이 도둑놈 같은 창고지기에 의해 없어지거나 썩어 가고 있는 걸 말입니다."(46)

 

이 작품이 단순히 이런 걸 다 드러내어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상에 대한 그 정도의 고발, 그리고 무위에 그칠 수밖에 없는 구원을 향한 호소…… 카프카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일까요?

작품의 의도라면, 다음과 같은 까뮈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카프카의 예술은 그 전체가 독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다시 읽게 한다. 그의 작품의 결말들, 혹은 결말의 부재(不在)는 여러 가지 설명들을 암시하지만, 그것들이 분명한 언어를 통해 드러나지는 않으며, 또한 그것들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려면 그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읽는 게 요구된다. 때로는 이중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거기서 두 번 읽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그것이 바로 그 작가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서 모든 것을 세세하게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상징이란 언제나 흔히 있는 것이며, 그 해석이 아무리 정확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가는 거기에 그 활기밖에 되살려 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낱말을 하나하나 축어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징적인 작품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상징이란 언제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넘어서며, 자신이 의식하고 표현하는 것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상징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상징을 들쑤시지 말 것, 선입관 없는 태도로써 그 작품을 대할 것, 그리고 그 숨겨진 흐름들을 찾지 않을 것 등이다. 특히 카프카의 경우에는, 카프카의 원칙들에 동의하고서, 드라마를 대할 때에는 그 외면적인 것을 통해, 소설은 그 형식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공정하다.2

 

 

 

 

출판사 '혜원'의 이 책은 충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디자인도 아름다운 편이고, 판형도 간편하고, 편집도 경제적이고, 더구나 책값이 5000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번역이 매우 안정적이어서 읽기에 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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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베르 까뮈,「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 육문사, 1993, 부록, 168쪽) 중에서.
2. 위의 책, 위의 글, 167~1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