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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침묵』

by 답설재 2013. 2. 13.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침묵』

공문혜 옮김, 홍성사 1982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직 왼쪽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는 신세가 되었더랍니다. 내 친구 블로거(자훈)가, 그 장 도미니크 보비가 쓴 실화라며 『잠수복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라는 책을 소개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답니다.

 

“내가 만일 나의 지적 잠재력이 시금치나 당근의 지적 능력보다 월등하게 우수함을 증명하고자 한다면, 의지할 데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다.”

“목욕의 즐거움을 상기할 때만큼 현재의 내 상태가 비참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많지 않다.”

 

                                   내 친구 블로그의 『잠수복과 나비』로 바로가기 http://blog.daum.net/lipok/16101303

 

이 책을 소개한 내 친구는,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회복지사입니다. “하도 기가 막힌 상황을 자주 겪다 보니 제 자신의 병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세상에는 어찌나 병의 종류도 많던지……." 하고는 "하느님은 분명 이 대목에서는 잘못 하신 것 같아요. 다음에 반드시 따져볼 것입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비종교인으로서의 저는, 머리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 자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뭘 알겠어요?"

(혹은) "하느님은 무슨 하느님요. 그런 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렇게 개판을 치는 종교인들이 있겠어요? 없는 게 분명하니까, 자기네들은 그걸 다 아니까, 그따위 짓거리를 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진정한 종교인도 허다합니다. 언젠가 소개한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는, 저로서는 가장 감명 깊은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제 가슴속의 그 신부님은 교회의 역사책을 펴면 실제로 몇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 실존인물로 생각되는 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그런 작품을 쓴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신부님을 위해서라도 하느님이 꼭 존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침묵』도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일본인 작가가 마치 서양인(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인 것처럼 쓴 그 표현력 혹은 진실성도 놀라운 것이지만, 이런 종교인이 있기 때문에 종교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마치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에서 뵈온 그 신부님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세바스티앙 로드리고는 일본에 파견된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연락을 받은 로마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허락을 받아내어 일본에 파견된 포르투갈의 예수회 소속 신부입니다.

 

페레이라 크리스트반 신부에 이어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가 파견되는 상황은 이렇습니다. 1587년 이래 일본의 태수 히데요시(秀吉)가 종래의 정책을 바꾸어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나가사키의 니시사카(西坂)에서 스물여섯 명의 사제와  신도들이 화형(火刑)으로 처형되고, 각처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으며, 도쿠가와(德川) 장군도 이 정책을 이어받아 1614년 모든 가톨릭 선교사를 해외로 추방하기로 결정하는 등 막부(幕府) 시대의 가톨릭 박해가 감행됩니다. 그러므로 로드리고 신부는 로마 교황청의 승낙을 받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중간 기착지인 마카오의 선교학원 발리냐노 신부로부터도 어려운 허락을 받았으므로 그가 일본 관헌에 붙잡히는 일은 읽는 사람의 가슴을 졸이게 하면서도 시간 문제였을 뿐입니다.

 

나가사키 부교오(奉行; 지방행정관)에게 붙잡혀 간 신부 로드리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聖畵)를 밟고 배교(背敎)를 하면 고문 당하고 있는 신도들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갈등합니다. 신부는 끊임없이 기도하며 신에게 답을 구하지만 신은 계속 침묵을 지킵니다.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신부는 창살을 꽉 붙잡은 채 떨고 있었다.

그가 혼란에 빠진 것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뜰 안의 정적과 매미 소리와 파리의 날개 소리였다. 한 인간이 무참히 죽었는데도 바깥 세상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전과 다름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바보스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순교란 말인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왜 당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저 애꾸눈 농민이 오로지 당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런 정적이, 이런 고요가 계속되는가? 이 한낮의 고요함. 매미 소리. 이런 어리석고 참혹한 일과는 전혀 관계 없다는 듯이 그분은 외면하고 있다. 그것이,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186)

 

 

 

로드리고 신부가 여러 차례의 고통의 순간에 '신은 왜 응답하지 않는가?' 하고 처절한 회의를 거듭하여 마침내 성화를 밟기 위해 발을 들게 되고, 그 순간 침묵하던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입니다.

 

 

"저는 신부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성화에도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기치지로의 울먹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그 성화 위에 나도 발을 놓았다. 그때 이 발도 움푹 들어간 그분의 얼굴 위에 있었다. 내가 수없이 생각한 얼굴 위에. 산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나 옥사에서 언제나 생각해 내며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그분의 얼굴 위에. 인간이 생존해 있는 한 선과 아름다움 그 자체인 얼굴 위에. 그리고 평생을 사랑만을 베풀려고 했던 그분의 얼굴 위에. 그 얼굴은 지금 성화판의 나무판자 속에서 닳고 패어 버린, 그리고 슬픈 듯한 눈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다. "밟아도 좋다"라고 슬픈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가서 네 할 일을 이루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를 밟아도 좋다고 말한 것처럼 유다에게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라고 말했던 것이다. 네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을 테니까."

그때 그는 성화에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내려놓았다. 다섯 개의 발가락이 사랑하는 분의 얼굴 바로 위를 덮었다. 이 격렬한 기쁨의 감정을 기치지로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293~294)

 

 

그리하여 성화를 밟고 배교한 신부 로드리고의 고난은, 배교를 하지 않고 고뇌를 거듭하던 이전에 비해 더욱 막심한 것이었지만, 그는 그 시련이 그분의 사랑을 알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남들은 비웃는 배교에 대해서,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직도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최후의 가톨릭 신부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그분의 말씀을, 그분의 행위를 따르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믿음이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는 것을 뜻한다는 말과 같이.……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부' (꼭 이렇게 표현해야 하는지…… '일부'라고……) 종교인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이른바 지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섣불리 그 '성화(聖畵)'를 밟아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사건들을 너무나 자주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종교인인 저로서는, 이 소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믿음으로는, '성화'는 결코 밟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믿음도 없는 인간들에게 그 예외를 보여주고, 그것이 허용되는 특수한 경우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보기에 희한한 종교인들이 나오는 것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희한한 종교인들이야말로 배교자들입니다.

 

그것은, 성화를 밟는 일은, 가령 로드리고 신부 같은 이에게만 신으로부터 특별히 허용되는 일이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