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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스펙specification

by 답설재 2013. 1. 8.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 하나쯤 다룰 줄 알아야 아이의 인생이 풍요롭다느니 …(중략)… 아이의 미래가 4세에서 7세 사이에 결정된다느니

                                                       ── 김 숨,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소설, 『현대문학』 2012년 8월호, 56쪽) 중에서.

 

 

"스펙을 쌓아야 한다!”

“일찍부터 스펙을 관리해 주어야 좋은 대학에 보낼 수 있다.”

“직장을 구하려면 스펙부터 쌓아야 한다.”

 

인터넷에 들어갔더니 스펙에 관한 책들도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스토리가 더 중요하다는 책이 제일 위에 있다니……)

  『청춘이 스펙이다』

  『인문학으로 스펙하라-바탕지식을 갈구하는 2030세대를 위한 기초인문학』

  『일 잘하는 여자의 결정적 스펙』

  『인문의 스펙을 타고 가라』

  『대한민국 20대 스펙을 높여라』

  『청춘 스펙 열전』

  『결정적 스펙』

  『리얼 스펙 업』

  『20대 스펙 콤플렉스를 던져라』

  『중고등학생 성공스펙 11가지 전략아이콘』

  …………

 

스펙에 관한 책이름이라도 다 옮기려고 들었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책 제목에 ‘스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부터, 그렇지는 않지만 내용에 스펙이 포함된 것까지 25권씩 36번까지 있다. 그러니까 900권이라는 얘기!

나는 세상을 거의 모른 채 살아왔다.

 

 

 

 

코리아차이코프스키협회 전찬구 이사장 사무실에 가면 이 포스터가 지금도 붙어 있다. 그분과 그분의 처남은 해마다 몇 차례씩 러시아의 음악가들을 초청한다. 그렇게 해놓고, 예술의전당, 그 호사스런 자리에 불러주는 고마움, 미안함 때문에 늘 쑥스럽다. 기껏해야 라디오나 들어온 사람을…………

 

 

 

지난해 11월 11일 저녁,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본 피아니스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

'저 녀석이 피아노를 치지 않았으면 뭘 해먹을까?' 싶은 20대 젊은이 미로슬라브 꿀띠쉐프……

그는 그 저녁, S. Prokofiev 피아노 협주곡 제1번 Db장조, P.I. Tchaikovsky 피아노 협주곡 제1번 Bb단조를 연주했다.

 

1985년 '아름다운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6세에 첫 공연을 하고 10세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을 협연할 만큼 어린시절부터 피아노에 대한 천재성을 떨쳤으며, 2007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 2012년 몬테 카를로 국제 콩쿠르 제패 등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연주회 안내문 참조).

 

 

 

 

그가 연주를 마치자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고(요즘은 대체로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정말로 그의 연주는 뛰어난 것이었을까?), 그동안 그는 좀 멋적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바람이 불면 분명히 흔들릴 것 같은 모습으로…… 혹은 너무 많이 쑥스럽다는 듯……

키가 멀쑥하고 얼굴이 하얀 청년이 한동안 그렇게 서 있는 모습이라니………… 연주에 열중한 뒤여서 자칫하면 쓰러질 것 같았는지, 피아노 귀퉁이를 짚고 서 있는 어정쩡한 모습………… 무대 뒤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턱대고 서 있을 수도 없다는 표정으로……. 혹은 자신으로서는 청중의 박수가 그만 그치면 더 좋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스펙을 쌓지 못해서 그런가?' ^^

 

그의 그 모습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고 당당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색해하고 거북해하고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애써서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흡사 무슨 잘못을 들킨 아이처럼………… 다만 그동안 그럴 때의 쑥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참는 연습은 좀 했을 것 같은 표정이기도 했다.

'이러다가 말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모두들 일어서서 홀을 나가겠지.'

 

 

 

 

저 나비타이는 누가 매주었을까………… 혼자서는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옷 입는 건 누가 거들어 주는 걸까…………

 

 

"어이! 미로슬라브! 자네는 학교 다닐 때 무슨 스펙을 쌓았지?"

그렇게 물으면 그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스펙을 쌓는데 열중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나중에 아주 행복해지는 걸까? 우리가 아이들의 스펙을 잘 관리하는데 열중하면 나중에 우리나라는 저 미로슬라브의 러시아보다 훨씬 품위 있는 나라가 되는 걸까?

 

 

 

 

스펙을 쌓아야 한다면 어떤 스펙을 왜 쌓아야 하는 걸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할 아이는 피아니스트가 되는데 필요한 스펙?

어느 아이나 누가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좋은 내용의 스펙을 쌓으면 누구나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될 수 있는 스펙?

 

그 스펙을 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할 아이는 피아니스트가 되는데 필요한 교육?

어느 아이나, 누가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이를 악물고 노력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면 누구나 판검사가 되고 의사가 될 수 있는 교육? 마치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시스템처럼!

 

 

 

 

핸드폰에 들어 있는 저 청년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해본 생각들이다. 적어도 그는 때묻지 않은 청년이다. 때묻지 않으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스펙에 꽂힌 사람들은, 때묻지 않은 것을 스펙 관리에 비추어보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고 대답하겠지? 스펙과 그것은 상관관계가 적다고 하겠지?

그럼 스펙은 무엇과의 상관관계가 깊은 것일까? 돈? 권력? 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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