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W.G. 제발트 『이민자들』Ⅱ - 교사 파울

by 답설재 2012. 7. 22.

 

 

 

W.G. 제발트 소설 『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

-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

 

 

 

 

소설 『이민자들』의 네 이야기 중에서 둘째 편은 파울 베라이터라는 아름다운, 독일인 초등학교 선생님 이야기다.

아이들에게는 '모범적인 형처럼, 그들의 일원처럼' 느껴지던 그 선생님이 1983년 12월 어느 날, 막 일흔네 번째 생일을 지내고, 말하자면 그냥 살아도 곧 세상을 떠나게 될 적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버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의 억울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파울 베라이터는 이런 선생님이었다.

 

파울의 전임자는 엄하기로 악명이 높던 호르마이어 선생님이었는데, 금지된 짓을 하다가 그에게 적발된 학생들은 몇 시간 동안 모난 장작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는 학생들이 창밖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창문의 아래쪽 절반을 석회 도료로 하얗게 칠해버렸다. 1946년 아울이 복직했을 때 맨 먼저 한 일이 이 석회칠을 직접 면도칼로 꼼꼼하게 벗겨낸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별로 급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파울은 날씨가 궂은날에도, 심지어 혹한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습관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산소가 부족하면 인간의 사고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파울은 수업 중에 앞쪽 창가로 가서 반쯤은 학생들을 향해, 반쯤은 창밖을 향해 서 있기를 좋아했다. 그는 그 구석진 곳에서 대개 얼굴을 약간 추켜들고 안경알을 반짝이면서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그의 문장들은 질서가 잘 잡혀 있었고 사투리도 섞여 있지 않았지만, 약간의 언어장애 혹은 발성장애가 있는 듯하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는 후두가 아니라 가슴 언저리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파울이라는 사람은 함석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금속부품으로 조립해놓은 기계이며, 어느 한 군데가 조금만 고장 나도 영구히 복구될 수 없는 민감한 장치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우리들의 아둔함 때문에 절망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럴 때면 왼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는데, 그러면 머리카락이 기괴하게 위로 뻗어올랐다. 우리들이 일부러 멍청한 체한다고 생각한 그는──아마도 그의 짐작이 맞았을 것이다──화가 치밀어 손수건을 꺼내 깨물기도 했다. 그런 발작이 멈추면 그는 언제나 안경을 벗고, 무방비하고 눈먼 사람처럼 학생들 사이에 망연자실 서 있다가 이윽고 안경알에 입김을 불어가며 꼼꼼히 안경을 갂았다. 그 순간이나마 우리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 안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47~48)

 

 

 

파울은 단 한 번도 강단에 올라서서 학생들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가르치지 않았고, 칠판 앞이나 세계지도 옆, 책상들 사이, 난로 옆에 서 있었고, 특히 남쪽 창문 옆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파울은 교회를 싫어했고 신의 대리인을 혐오했다. 성스러운 체하는 인간들 때문에 극도의 혐오감에 휩싸여 흥분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종교교사들은 그를 길 잃은 영혼으로 생각했고, 아이들에게 그가 올바른 종교로 이끌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물론 아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수업시간의 4분의 1가량은 교육지침에 없는 내용을 가르치는 데 썼다. 자연 과목에 대한 열정이 특히 뜨거워서 여우의 사체를 발견하고는 며칠 동안 푹 고아서 나온 뼈를 학교로 가져가 학생들과 함께 제대로 된 골격을 조립해보고자 했다.

 

그는 『라인 가정의 벗』이라는 책을 자비로 구입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수업은 언제나 지극히 직관적이어서 학교를 벗어나 주변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눈으로 관찰하는 견학 수업을 중시했다. 발전소, 제련소, 바구니 공장, 치즈 공장, 양조장, 맥아즙 제조장, 맥아 탈곡장, 소총 제조업자 코라디의 작업장…… 걸어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가보았다.

플루엔슈타인 성, 슈타르츠라흐 협곡, 호펜 북부의 운하수위조절소, 칼바리엔 산의 화약탑, 1차 세계대전 후에 폐광이 된 슈트라우스베르크 갈탄광산, 그곳의 붕괴된 갱도와 알트슈타트 역까지 갈탄을 실어나르던 공중 케이블의 흔적…………

 

그는 날씨가 아주 좋으면 식물학습을 하거나, 식물학습을 구실로 아이들을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그냥 놀게 해주었다. 아이들처럼 근교로 소풍 가는 것을 좋아했고, 점퍼나 셔츠만 걸친 채 독일 반더포겔* 운동의 모범적인 걸음걸이로 얼굴을 약간 치켜들고 성큼성큼 경쾌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걸으면서, 심지어 산을 오르면서도 습관적으로 플루트 음색과 비슷한 휘파람을 불었는데, 그 재주는 진기하다고 할 만큼 뛰어났고 놀랍도록 풍성했다. 가령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벨리니의 오페라나 브람스의 소나타를 듣다가 그 선율을 발견하고 깊은 감동에 휩싸이게 한 것이다.

 

그는 또 그렇게 걷다가 쉬는 시간에는 기다란 면양말에서 클라리넷을 꺼내 느린 악장들을 연주했다.

그러나 보름마다 한 번씩 노래를 배우는 음악시간에는 재미보다는 진지한 의미가 더 강조되었다. 가령 「슈트라스부르크의 참호 위에서 그렇게 내 슬픔은 시작되고」 「산 위의 성」 「초록의 화환 술집에서」 「강가를 따라 내려가네」 같은 노래를 가르쳤다.

 

그는 오르간 연주자 브란트아이스의 아들을 초청해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고, 그 연주에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고, 그 격정을 이기지 못해 솟구쳐오르는 눈물을 보여 아이들에게 음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파울은 태생적으로 슬픈 선생님이었다.

 

수업중이든 쉬는 시간이든, 학교 밖에서 함께 걸어갈 때든, 갑자기 어떤 생각에 빠져들면 구석으로 가서 앉거나 그렇게 서 있었고, 그럴 때의 그는 마치 불행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는 아름다운 루씨 란다우 부인을 너무 늦게 만났다. 그녀는 파울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쉽게도 나는 그를 너무 늦게 만났어요. 1971년 여름, 프랑스 쥐라의 쌀랭레벵에서였지요(58).

 

내면의 고독 때문에 마음이 헐어버린 파울은 루씨 란다우 부인을 더할 나위 없이 배려해주고 즐겁게 해주었다. 그녀와 함께 쌀랭에서, 그리고 쌀랭을 벗어나서, 온천과 암염광산, 베를린 요새, 빠스뙤르 생가, 왕립 제염소, 그리고 산의 정상에서 제네바 호수와 몽블랑의 거대한 몸체, 바누아즈 산의 빙하, 알프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는 몽뜨롱을 여행했다. 그 여행에서 그는 란다우 부인으로 하여금 도시와 자연의 첨예한 대비가 우리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난생처음 실감하게 해주었다.

 

1935년 여름, 막 교직에 들어섰으므로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만난 헬렌 홀렌더는 '자유분방하고 영리하고 파울이 즐거이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는 깊은 물과도 같은 여성'(란다우 부인의 평가)이었지만, 헬렌은 그 후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 일은 파울의 슬픔이 되었겠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그는 밀실공포증이 심해져서 출근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학생들을 아주 좋아하면서도 때로는 경멸스럽고 지긋지긋한 종족처럼 느껴져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울분이 솟구쳐오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그 혼란, 정신건강에 대한 걱정을 가능한 한 억누르며 숨기려고 했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아픔을, "파울이라는 이상한 유령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고 싶다"면서 가볍고 무심하게 넘기는 아이러니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파울은 블루멘 가의 레르헨뮐러 원예농장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지방 기숙학교 생활도 유년시절과 다름없이 행복했다.

라우잉엔 교원양성소 생활은 지극히 고루한 방침들과 병적인 가톨릭 신앙에 의해 지배된 교육이었다. 파울은 그 학교를 라우잉엔 '교원조련소'라고 표현했으나 어떠한 곤욕을 치르고서라도 교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 교육을 견뎌냈다. 그가 영혼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 그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이상주의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염원한 그 교사직을 지켜내기가 어려운 일생을 보냈다.

 

1935년 여름, 그의 가슴을 채웠던 아름다운 미래는, S시의 외딴 마을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이들의 이름을 겨우 외울 즈음, 법규 때문에 교사직을 유지할 수 없다는 공문에 의해 사상누각이 되어 무너져버렸다. 파울은 난생처음으로 극복할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그를 덮쳤던 그 패배감을 그는 끝끝내 이겨내지 못했다.

 

파울의 아버지는 반(半) 유대인이었으므로 파울은 4분의 3만이 아리아인이었다. 파울의 할아버지인 유대인 암쉘 베라이터는 잡화점을 운영했는데, 쉰이 넘은 나이에 여점원 로지나와 결혼해서 파울의 아버지 테오도어 베라이터를 낳았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잡화점을 운영한 파울의 아버지 테오도어는 길 건너 노인병원의 가난한 환자들을 대할 때나 양조장 주인의 씀씀이가 헤픈 부인을 대할 때나 항상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훌륭한 독일인 테오는, 1936년 종려주일(부활절 직전의 일요일)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2년 전인 1934년에 고향 군첸하우젠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그곳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이 처참한 공격을 받은 사건 때문에 생긴 마음속의 분노와 불안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 종려주일에 유대인 집들의 창문이 깨어졌고, 지하실에 숨은 유대인들은 밖으로 붙잡혀 나와 거리에서 질질 끌려다녔던 것이다.

잡화점은 부인 테클라가 물려받았지만, 그럴듯한 사업가 행세를 하는 가축업자에게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고, 그 굴욕적인 거래 후에 테클라는 우울증을 앓다가 몇 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파울은 1939년 초에 프랑스에서 가정교사 일을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돌아가 자동차정비소에서 일하다가 징집영장을 받아 전선으로 나갔다. 그는 폴란드, 벨기에, 프랑스, 발칸반도, 러시아 지중해 연안,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사람의 가슴과 눈이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을 숱하게 보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났을 때, 그처럼 불행한 세월을 보낸 파울은 다시 독일의 그 S시로 돌아가 교단에 섰다. 그는 뼛속 깊이 독일인이었고, 언제나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던 사람이었고, 천성적으로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퇴직 후 프랑스에서 살면서도 독일의 그 S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진심으로 S시를 혐오했고, 골수에 사무치도록 역겨워하던 그곳 주민들과 함께 그 도시를 파괴하고 갈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는 해마다 몇 번씩 S시를 다녀가곤 했다.

마지막 나날에 파울은 루씨 란다우 부인의 정원 관리와 독서에 파묻혀 지냈다. 정원의 푸나무들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이들처럼 '가르치는 대로' 자라기 때문이었을까.

 

파울은 정말로 독창적으로 정원을 바꿔놓는 데 성공했어요. 어린 나무들, 꽃들, 관엽식물들과 덩굴식물들, 그늘을 만들어주는 담쟁이 화단, 만병초, 장미나무, 관목들──그 모든 것들이 잘 자라났고, 빈 곳이 한 군데도 없었어요. 파울은 날씨가 아주 나쁘지만 않으면 매일 오후 정원에서 일했고, 가끔씩 아무 데나 앉아 날로 풍성해지는 초록빛을 느긋하게 바라보곤 했지요. 그를 진료한 의사도 눈을 보호하고 호전시키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나뭇잎들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것이 좋다면서 정원 일을 권했어요(75).

 

그러나 밤이 되면 파울은 의사의 권유와 지시를 무시하고 새벽이 될 때까지 불을 켜놓고 있었다. 그는 그 시간에 참 많은 책들을 읽었다. 알텐베르크, 트라클, 비트겐슈타인, 프리델, 하젠클레버, 톨러, 투홀스키, 클라우스 만, 오시에츠키, 벤야민, 쾨스틀러, 츠바이크 등, 그러니까 자살했거나 자살할 뻔했던 작가들의 책들이었다. 그렇게 읽으며 그는 수백 쪽을 발췌해 기록했다.

 

파울이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의 출신 성분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점점 늘어나 결국에는 그 자신도 자신이 더 이상 S시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민자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끗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파울의 눈이 더 이상 독서를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파울은 그의 눈이 이렇게 오랫동안 버텨준 것만도 고맙고 놀랍다고 했다. 또 이제 새로운 세계는 나름대로 편안할 것이라고 했다. 란다우 부인은 파울에게 페스탈로찌의 책을 모조리 읽어주겠다고 하자, 파울은 맨 먼저 『은자의 황혼』을 읽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겨울, 그는 S시로 돌아가 그곳의 철로에서 스스로 일생을 마친다. 란다우 부인에 의하면 그는 기차의 종착역은 항상 죽음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제자인 화자(話者)는 또 란다우 부인에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죽는지 참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파울은 철도가 자신의 운명을 체계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화자는 그의 일생을 파악하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

1. 반더포겔 (Wandervogel) 은 '철새'라는 뜻의 청년들의 집단 도보운동 또는 그 집단이다. 1901년 독일 학생들이 도보 여행 단체를 조직해 반더포겔이라 일컬은 것이 시초이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조국애를 외쳤으며, 허약한 도시 청년들을 대자연 속으로 끌어내어 몸과 마음을 단련케 했다.(위키백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