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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테네시 윌리암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by 답설재 2012. 6. 11.

테네시 윌리암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김소임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2010

 

 

 

 

 

 

『A Streetcar Named Desire』(1951, 미국) : DAUM 영화정보에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원작(희곡)입니다. 영화를 본 적이 없는데도 장면 전환이 영화를 보는 것 같고, 긴박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뉴올리언스의 빈민가, 자유분방하고 서정적입니다. 바나나, 커피 향과 함께 창고 건물들 너머 강물에서는 훈기를 느낄 수 있고, 길모퉁이 술집에서 흑인 악사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옵니다.

  미군 특무상사 출신의 외판원 스탠리와 남부 귀족 출신 스텔라 부부는,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합니다.

 

  5월초, 어둠이 깃드는 초저녁, 연락도 없이 찾아온 스텔라의 언니 블랑시가 그 평온한 가정에 물결을 일으킵니다.

  블랑시는 사사건건 간섭합니다. 제부(스탠리)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면서도 걸핏하면 과거 자신들의 영광을 들먹이고 동생 부부가 사는 모습이나 제부의 행동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곧 귀부인인 척하던 블랑시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그녀는 동성애자 남편이 자살한 후에는 낯선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고, 교사 신분으로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유혹해서 학교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드디어 고향에서 추방 당했기 때문에 동생 스텔라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스탠리가 모두 폭로함으로써 블랑시는 교제하던 미치와 헤어지게 되고, 극도의 정신적 혼란 속에서 스탠리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그리하여 정신병원으로 끌려갑니다. 동생 스텔라는 그 사이에 아이를 낳고 언니가 떠나는 것을 슬퍼하면서도 스탠리에게 남습니다.

 

 

 

 

  그러므로 이 희곡은, 블랑시의 등장으로 시작되고, 블랑시의 퇴장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 봄부터 가을 사이, 스탠리와 블랑시 간에는 문화의 차이, 인생관의 차이에 의한 다툼이 날카롭고 치열하게 전개되고, 외형적으로는 스탠리의 절대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블랑시는 사랑과 꿈을 갖고 싶고, 거짓으로라도 그 사랑과 꿈을 가꾸어가고 싶은 인간 현실의 서글픈 화신(化身)입니다. 그녀는 동생 스텔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혀 강하거나 자립적이지 못했어. 사람이 여리면, 여린 사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려야만 해. 나비 날개는 부드러운 색을 띄어야만 하고 불빛 위에 종이갓을 씌어야만 해…… 여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거든. 여리면서도 매력적이어야 해. 그리고 나는, 나는 이제 시들어 가고 있어! 얼마나 더 눈속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83)

 

  미치라는 청년은 블랑시가 다가갔을 때 그녀를 눈부신 여인인 줄 알았습니다. 블랑시는 그 미치를 대상으로 또 하나의 사랑을 가꾸고, 그를 통해 꿈을 꾸고 싶은 환상에 젖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거예요! 내가 마지막으로 하늘 한 번 쳐다볼 동안 문을 열어 줘요. (현관 난간에 기대선다. 미치가 현관문을 열고 어색하게 블랑시 뒤에 서 있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일곱 자매 별을 찾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밤에는 아가씨들이 나오지 않았군요. 아, 저기 있네요. 저기 있어요! 고맙기도 하지!(93)

 

  우리는 보헤미안이 되는 거예요. 파리의 센 강 왼편 언덕에 있는 자그마한 예술가들의 카페에 앉아 있는 척하는 거예요! (블랑시는 양초 도막에 불을 붙여 병에다 꽂는다.) 주 쉬 라 담 오 카멜리야! 부제트 아르망!(나는 춘희! 당신은 아르망!) 프랑스어 아세요?(95)

 

  그 블랑시는 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인물, 강인하고 현실적인 스탠리에 의해 무참히 짖밟힙니다. 그 삶은 전쟁이고, 그들이 다툰 그곳은 전쟁터였습니다.

  블랑시는 치열하고 처절한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산업사회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싸우다가 하차한 것입니다. 서정적이고 섬세한 가슴으로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고 싶은 그 여자는, 거대한 농장 '벨 리브(아름다운 꿈)'를 잃어버렸으면서도 남부의 그 사라진 영광에 연연하며 현실의 냉혹함을 이기지 못하고, 적응하지도 못하고, 살아 남으려는 욕망만으로 그가 누구든 낯선 이의 친절에 의지(도피)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환상만 지닌 채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미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요, 큰 거미 말이에요! 그곳으로 내 희생물들을 끌어들였어요. (자신이 마시려고 술을 한 잔 또 따른다.) 그래요. 나는 낯선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가졌어요. 앨런이 죽고 난 뒤…….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만이 내 텅 빈 가슴을 채울 수 있는 전부인 것 같았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보호받으려 했던 것은 공포, 공포 때문이었죠. 여기저기, 생각해서도 안 될 곳까지, 마침내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에게까지도. 하지만 누군가가 교장에게 편지를 썼죠……. "저 여자는 도덕적으로 교사직에 적합하지 않다!"라고.(133)

 

 

 

 

  블랑시는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까요?

  아니, 그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왜 정신이상이 되어야 했습니까?

 

  그녀는 동생 스텔라에게 제부 스탠리의 심성과 행동에 대해 이렇게 절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작자는 짐승처럼 행동하고, 짐승 같은 습성을 가졌어! 짐승같이 먹고, 짐승처럼 움직이고, 짐승처럼 말한다니까! 아직 인간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뭔가, 인간 이하의 뭔가가 있다니까! 그래, 인류학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그림같이, 뭔가 유인원 같은 면이 있어!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그를 비껴가 버렸어. 그리고 여기 석기시대에서 살아남은 스탠리 코왈스키가 있는 거야! 정글에서 사냥감을 잡아 생고기째로 집에 들고 오지! 그리고, 그리고 너는, 너는 여기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고! 그 인간은 너를 때리기도 하고, 웅얼웅얼대기도 하고, 키스를 하기도 하겠지! 그때도 키스라는 게 있었다면 말이야! 밤이 되면 다른 유인원들이 모여들겠지! 저기 동굴 앞에서, 그 인간처럼 꿀꿀대고 꿀꺽꿀꺽 마시고 씹고 어슬렁거리겠지! 네가 포커 파티라고 하는 거! 그건 유인원들의 잔치야! 하나가 으르렁대면, 다른 하나는 뭔가를 낚아채고, 싸움이 시작되는 거지. 맙소사!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겠지만, 스텔라, 내 동생아, 그때 이후로 약간의 진보란 게 있었단다! 예술 같은 것들, 시나 음악 같은, 그런 새로운 광채가 그 이후로 이 세상에 들어왔거든! 어떤 사람들 안에서는 부드러운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고! 그걸 우리는 키워야 해! 그리고 매달려서 우리의 깃발로 삼고 지켜야 해!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향한 이 어두운 행진에서……. 짐승들과 함께 뒤쳐져선 안 돼! (74~75)

 

 

 

 

  저 절규를 읽으면서도 가슴이 저리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산업사회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싶기조차 했습니다.

  젠체하는 장면에서는 밉살스럽기조차 했습니다. 가령 욕실에서 나오며 제부에게 "(명랑하게) 안녕, 스탠리! 나 나왔어요. 깨끗하게 목욕하고 냄새도 상큼하고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에요!" 할 때는 '뭐 이따위 여자가 있나!' 싶었고, "(창문을 닫으며) 예쁜 새 옷을 입는 동안 실례 좀 할게요."(36) 할 때도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제정신이 아닌 여자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녀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스탠리가 인간 쓰레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부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신사고 나를 존중해 줘요. (흥분해서 말을 만들어 내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내가 친구로 함께 있는 거예요. 재산이 많다는 게 때로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죠. 한없이 말이죠! 나는 그런 것들을 제공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목이 멘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143)

 

  재산이 많은 어느 외로운 신사가 블랑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물론 거짓입니다. 스탠리는 블랑시의 이 절규를 듣고도 끝까지 블랑시를 증오하고 가증스러워합니다. 형수인 그녀를 겁탈해 버리고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합니다.

 

  저 절규를 읽으며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 저렇게 절규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저 절규가 바로 내 가슴속 이야기 같기도 했습니다.

  사실은, 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나는 나의 가슴속 이야기를 가증스러운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사실은 블랑시일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자칫하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야 할지도 모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