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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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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랑 세크직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by 답설재 2012. 5. 29.

로랑 세크직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이세진 옮김, 현대문학, 2011

 

 

 

 

 

 

 

 

 

KBS TV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지상전에서 일본군이 한인 강제징용자들을 최전선에 세우고 자폭을 강요했다는 전 일본군 방위대장의 증언이 공개됐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당시 방위대장 이하 씨는 지난 1990년과 1992년에 "조선인들이 등에 폭탄을 짊어지게 하고, 도망치면 죽이겠다고 해서 모두가 (미군) 전차에 몸을 부딪쳐 숨졌다." "진짜로 싸운 건(일본군이 아니라) 오키나와 주민과 조선인들이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종전 67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한인 희생자 수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이하 씨의 인터뷰는 그나마 거의 유일한 증언이라고 합니다.1

 

이러다가 언젠가 일본인들이 이렇게 주장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언제 조선을 침략했나?"

"우리가 언제 조선을 지배했나? 증거를 대어보라."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은 유대계 오스트리아 소설가, 전기 작가,2 "자유는 지상 최고의 재산"이라고 한 휴매니스트 슈테판 츠바이크가 독일에 의한 야만의 시대에 전쟁과 박해, 죄책감에 따른 절망의 나날을 그린 소설입니다.

그 마지막 나날은, 1941년 9월 두 번째 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알트만과 함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여 1942년 2월,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입니다.

 

그는 원래 독일어로 글을 쓰던 작가였습니다. 그러던 그는 나치를 피해 1934년 3월 6일 빈을 떠나 독일 찰츠부르크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갔지만 '국내 거주 적국인'이라는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도 그는 '적국에서 망명한 외국인'일 뿐이었고 그곳까지 뼏쳐온 '악마'들의 손길을 피해 브라질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협박 편지는 그곳에서도 받아야 했고, 자살한 작가들(에르빈 리거, 에른스트 톨러, 발터 벤야민, 에른스트 바이스 등)의 망령에 시달려야 했고, "행동하라!"고 다그치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으므로3 브라질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어서 리우에서 페트로폴리스로 도망을 가기도 했습니다.

로망 롤랑의 편지는 그의 방랑, 환상, 후회, 그리움에 대해 이미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브라질에 정착할지는 잘 모르겠네. 그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자네 나이가 너무 많거든. 그리고 사람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일개 그림자가 되고 말지."(181).

 

그 예측은 옳았습니다. 츠바이크의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모국어의 세계가 내게서 소멸하고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해버린 뒤에, 내 인생을 근본적으로 다시 일구기에는 이 나라만큼 호감 가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 그렇지만 예순을 넘겨 다시 한 번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면 특별한 힘이 요구된다. 나는 고향 없이 떠돌아다닌 오랜 세월 동안 지쳐버리고 말았다."(228)

 

 

 

그의 영혼은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에 치를 떨었고, 신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하느님도 믿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도 믿지 않았습니다(48, 173). 그의 고통은 보다 근원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자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유서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나는 제때에,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 생애에서 정신적인 작업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으며, 개인의 자유는 지상 최고의 재산이었다. / 내 모든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원컨대, 친구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이 지나 마침내 동이 트는 아침을 보기 바란다. 너무나 조급한 이 사람은 먼저 떠난다."(228~229)

 

그는 전처 프리드리케에 대한 우정과 사랑, 신뢰를 끝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자살하면서도 그 자살에 대해 프리드리케만은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정도로 그의 영혼이 느낀 고통을 꿰뚫어보았던 사람은 그녀뿐이었습니다(218).

그러나 그만큼 두 번째 부인 로테의 사랑도 깊었습니다. 그 사랑이 그가 마지막 가는 길의 외로움을 달래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필자는 로테의 심경을 이렇게 그렸습니다(200~201).

 

나는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 어둠의 한가운데서, 그이와 함께 길을 가리라. 깊은 숲 속, 모든 것이 얼음처럼 차갑더라도 나를 사르는 불길이 우리 두 사람을 태우리라. 나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그의 영혼을 덥혀주리라. 나의 눈물이 그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그이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내 사랑, 무한도 뛰어넘을 내 사랑이 마침내 그 마음에 다다르고야 말 것이다. 이 지극한 사랑으로 그가 빼앗긴 것을 다시 얻게 하리라. 나의 사랑이 어둠의 제국을 지배할 것이다. 어쩌면 저세상은 너무 어두워서 그이가 나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하늘에도 별은 빛날 테니 나도 거기서 빛을 발하리라. ……

 

 

 

유대계 프랑스인 로랑 세크직이 전기문 형식으로 쓴 소설입니다. 그러나 독일의 만행에 대한 기록으로는, 어느 역사책보다 감동적이고 위력적일 것 같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이 오스트리아의 어느 역사책보다 더 완벽한 기록이 아닐까,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픽션의 힘이 역사적 사실의 기록보다 위력적일 수 있는 것은, 픽션은 진실하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작가들은 일본의 만행에 대해 어떤 작품을 남기고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당한 일은, 역사에는 잘 기록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일제'는 끊임없이 역사를 새로 쓰고 있습니다. 저들은 그것을 '역사의 창조'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에게 자신들이 우리를 못살게 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새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이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무엇을 어떻게 그 증거로 내놓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독서가 부족해서인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 같은 소설 한 편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대해서는, 그녀의 작품이 일본보다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팔렸다는 소문도 있는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인에게-리더(leader)편(篇)』에서 쓴 이야기를 우리의 역사가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그녀는 한·중·일 과거사 문제를 재판에 비유하여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즉 한국과 중국을 원고(原告), 일본을 피고(被告)로 규정하고, 배심원은 다른 나라들이 맡아야 한다면서, 원래 피고인들은 유능한 변호인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죄(斷罪)를 피하려면 철저히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왜냐하면 원고측(한국과 중국)은 탁자를 치며 목소리를 높이는 전법(戰法)을 잘 쓰기 때문에 일본인은 침묵해버리기 쉽고, 침묵하고 있으려면 증거를 통해 자신들의 무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정말로 그렇게 썼는지 의심스러우면 연락하십시오. 그 책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일본이 정말로 독일과 같은 야만을 저질렀는지가 문제입니다. 그것은 로랑 세크직이 쓴 이 소설에도 잘 기록되어 있으므로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100,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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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5.28 (21:59) KBS TV 뉴스(홍수진 기자)
  2. '타인을 말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105)

예를 들어 과거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의 편집장 에른스트 페더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토마스 만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길 원해. 그는 빛을 추구하지. 토마스 만은 빛이야. 그런데 자네는 죽지 못해 안달이지.'(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