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버트런드 러셀이 쓴 『런던통신』은 그가 1931~1935년에 '런던통신'이라는 신문에 실은 글을 모은 책입니다. 그 번역본에는 재미있는 글, 위트에 넘치는 글, 읽은 내용을 잘 기억만 한다면 어디 가서 유식한 척할 수 있는 글들이 수두룩하여 일일이 세어봤더니 135편이나 되었습니다.
가령 이런 것들입니다. '질투에 관하여' '섹스와 행복' '관광객의 미스터리' '노인을 위한 나라' '마음만 먹는다면' '립스틱을 발라도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경험에서 배워야 하는 것' '돈을 향한 희망, 돈에 의한 공포'……
그 중에는 「지겨운 사람들에 관한 연구」라는 글도 있습니다.
러셀은 이 글에서 밝히기를, 지겨운 사람이 되는 갖가지 방법들과 그것을 피하는 방법들을 정리해 일곱 권으로 된 학술논문을 쓸까 생각 중이며, 그 일곱 가지 부류 중, ❶ 계속되는 변명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❷ 지나친 근심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 ❸ 스포츠 이야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에 관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그 세 가지 유형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한 것은, 딴에는 그걸 살아가는 지혜의 한 가지라고 생각하며 변명을 일삼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걱정도 팔자"라거나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속담이나 우스개가 있듯이 이 세 가지 유형은, 아무래도 연구를 할 필요조차도 없는, 즉 따로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는 부류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겨운 사람 중에서도 지겨운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최소한 변명을 일삼는 사람, 지나친 근심을 하는 사람, 스포츠 이야기로 남을 지겹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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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이 이야기한 지겨운 사람들의 나머지 네 가지는, 현학적인 태도로 지겹게 하는 사람,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겹게 하는 사람, 허풍을 떨어 지겹게 하는 사람,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입니다. 러셀은 이들의 경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❹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영국 철학자)는 현학적인 태도로 지겹게 하는 사람의 완벽한 본보기(얼마나 현학적인 태도를 가졌기에……).
❺ 일화들을 들먹이며 지겹게 하는 사람은 보통 추억에 잠긴 나이 지긋한 신사들로서 그들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네가 그런 이야기를 하니 이런 일이 생각나는구먼."
❻ 또 여섯 번째의 허풍으로 지겹게 하는 사람들은 어떤 본성을 지녔기에 그렇게 자화자찬을 하는지에 따라 다시 몇 가지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흔한 부류는 '속물'.
❼ 마지막이자 최악의 부류는 ─여성들에게는 이 글을 인용하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지만─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들로, 거의 예외 없이 여자들.
현학적인 사람, 걸핏하면 잘난 체 일화를 들먹이는 사람, 허풍을 떠는 사람, 모두 다 지겨워서 러셀이 어쩌면 이렇게 잘 연구했는지 절로 감탄을 하게 되지만, '마지막이자 최악의 부류'는 '지나친 활기로 지겹게 하는 사람들'이고, 거의 예외없이 여자들? 지나친 활기로 남을 지겹게 하면서도 이걸 보고 안심하는 남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걸 착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나는 죽을 지경인데 상대방은 소를 삶아먹었는지 산삼을 먹었는지 호쾌하게 웃으며 덤벼들면 정말 얼른 그 자리를 피할 수 있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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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이 현학적이어서 사람을 지겹게 하는 유형으로 허버트 스펜서라는 인물을 예시한 것처럼, 저도 "러셀의 이 정리는 정말로 그런 것 같다!"면서 이 일곱 가지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의 예를 일일이 들어보고 싶지만, 만약 실제로 그렇게 했다가는 당장 일곱 명의 원수를 만들거나 최소한 "좀 만나서 따져보자!"는 전화를 받게 되거나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저조차도 자신을 최소한 저 일곱 가지 유형에는 속하지 않는 걸로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자기 자신을 저 일곱 가지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이나 그 유형들에 속하는 인물로 간주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말이 나왔으니까 좀 빙 돌려서라도 예를 들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들 후배('영원한' 후배)는 다 같은 교육부에서 근무하며 그 흔한 일화(逸話) 하나 만들지 못한 머저리들이란 듯 만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무슨 무용담(武勇談)처럼 들려주는 선배님이 더러 계시는데, 사실은 그 이야기들은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어서 듣고 앉아 있는 시간이 난감하고 따분하고 싫어서 속으로는 '이러니까 젊은 사람들 중에는 이 모임에 잘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겠구나.' 싶기까지 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느 직장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학교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저처럼 겨우 교장노릇을 해놓고는 "내가 교장으로 있을 때는……"으로 시작하는 무용담을 늘어놓으면 어느 후배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건 어느 경우에나 거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땐 먹을거리가 없어서 거의 굶다시피 했다. 6·25 전쟁 직후의 그 지난한 세월을 어떻게 보냈는지……" 딴에는 이건 정말 심각하다 싶어서 하는 소리지만 듣는 쪽은 심각하지 않다면 다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으로서의 처신은 우선 말부터 줄여야 할 것 같아서 매사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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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7차 교육과정" 하면, "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던 시절」의 첫 부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조금 수정해서 다시 실었습니다. 그런 제목으로 쓴 글이고, 내용도 당연하듯 딱딱한 것이니까 읽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사실은 이 바쁜 세상에 지난 이야기쯤은 읽을 필요도 없는 글이므로 이 부분을 발췌하여 본 것입니다.
☞「"제7차 교육과정" 하면, "야!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던 시절」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7988
☞ 버트런드 러셀의 『런던통신』에 관한 글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7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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