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홍길표 옮김, 문학동네 2009
Ⅰ
묘한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면 바로 그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야콥 폰 군텐이라는 귀족 출신 소년이 하인을 양성하는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원장 벤야멘타와 함께 사막으로 떠난다는 이야기다.
재미? 그렇게 보면 매우 재미있고 뭐 이런가 하면 영 애매하다. 재미있는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애매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령,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 거기서부터 희한한 학교가 아닌가? 물을 수도 없고 물어봤자 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세상 학교들이 이런 학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닌지, 게름직하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란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몸에 밴 채로는 성공할 턱이 없다. 아니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내면적인 성공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내면의 성공이 무슨 소용인가? 내면에서 이룩한 것들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기라도 하는가? 나는 정말이지 부자가 되고 싶다.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돈을 물쓰듯 써보고 싶다.(7)
이런 부분도 있다.
우리 생도들 혹은 훈련생들은 사실상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우리에게 과제가 주어지는 법은 거의 없다. 우리는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규정들을 달달 외우거나 『벤야멘타 소년 학교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라는 책을 들여다본다. 크라우스는 그밖에도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독학으로. 외국어 수업 따위는 우리 생도들의 시간표에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이라고는 단 한 가지뿐인데, 매번 동일한 내용을 반복한다. '소년이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수업이라는 것들이 모두 결국엔 이 질문을 맴돌 뿐이다. 지식이라고는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가르칠 사람들도 없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이끌고 가르쳐야 할 교사 나리들께서 잠에 빠져 계시다는 뜻이다.(9)
무슨 일을 하든 우리 훈련생들은 그것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한다. 왜 그것을 해야만 하는지,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이 모든 사념 없는 복종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이 복종한다. 우리가 그 일들을 해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과연 합당하고, 정당한가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일을 수행한다. 그렇게 청소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40)
수업시간에 우리 학생들은 시선을 앞쪽에 고정시킨 채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 있다. 혼자 슬쩍 코를 푸는 일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두 손은 무릎 위에 가만히 놓여 있어 수업시간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손이란 인간의 허영과 탐욕을 입증하는, 손가락이 다섯 달린 증거물이므로 책상 아래 얌전히 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61~62)
우리가 받는 수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론과 실습, 하지만 두 부분은 아직까지도 내게는 마치 꿈같은 느낌, 무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의미심장한 동화와도 같은 느낌일 뿐이다. 달달 외우기, 그것이 우리의 주요 과제다. 나는 아주 쉽게 외우고, 크라우스는 너무 힘들게 외운다. 그 때문에 그는 항상 공부 중이다. 크라우스가 헤쳐 나가야만 할 난관들은 그의 근면함 속에 숨겨진 비밀이자 또한 그것의 해답이다.(69)
배우는 것이 거의 없는 학교,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는 학교,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 과제가 주어지는 법도 거의 없고, 그저 그곳을 지배하고 있는 규정들을 달달 외우기만 하는 학교, 수업이라고는 단 한 가지뿐으로, 매번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학교…………
먼 연관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책을 읽어 나가며 이런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앨빈 토플러가 이미 30년 전(1980, 『제3의 물결』), 산업시대의 교육은 다만 '시간엄수' '복종' '끊임없는 반복'을 그 특징으로 할 뿐이라고 비웃었던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로베르트 발저는 앨빈 토플러보다 더 혹독하게 비웃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만, 발저의 소설에서 주인공 야콥은, 스스로 하인이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입학한 점이 우리 아이들의 경우와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사회의 '바람직한' 일원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목표를 잘 달성하려면 학교에 가야 하고, 그 체제에 잘 순응해야만 하는 행위를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설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 것이다.
Ⅱ
난해하다. 어려운 단어가 있어서 난해하다고 하는 건 아니다. 그런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
대부분 구체적 시실들을 이야기하지만, 그걸 단편적인 모습이 아니라 복합적·통합적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그것이 늘 다른 사실들까지 보게 하는 비유와 상징이 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가령, 동료학생 크라우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는 수없이 나온다.
크라우스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는 부자다.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그를 공력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는 바위 같다. 그래서 인생은, 거센 풍파는 그의 미덕에 부딪혀 산산히 부서진다. 그의 천성, 그의 본성에는 미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를 좀처럼 사랑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를 미워한다는 말은 아니다. 누구나 사랑스러운 것, 매혹적인 것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 파멸되거나 악용될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크라우스에게는 심신을 소진시키고, 잠식해가는 인생의 애무가 감히 시도도 하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고독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매우 꿋꿋이, 범접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서 있다. 마치 반신(半神)처럼.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 역시도…………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 크라우스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로써 크라우스라는 인물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인상이 다음 장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인물로 읽혀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화자 야콥 폰 군텐이 일기를 쓰면서 생각나는 크라우스를 그때그때 묘사해 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는 이런 것이란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 이제 바깥바람을 조금 쐬며 몸을 움직여보자꾸나." 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작고 하얀, 낯익은 지팡이로 벽을 건드렸다. 그러자 몹시 불쾌감을 불러 일으키던 지하실이 통째로 사라져버렸고, 우리는 매끄럽게 탁 트인, 얼음이나 유리로 닦은 것 같은 길 위에 서 있었다. 우리는 마치 멋진 스케이트를 신은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춤을 추었다. 길이 우리 발밑에서 마치 파도처럼 출렁거렸기 때문이다. 황홀했다. 그런 것은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정말 멋져요." 우리 머리 위로는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기묘한 담청색을 띠면서도 어두컴컴한 밤하늘에서, 달빛은, 마치 이 세상을 초월한 듯한 광채를 내뿜으며,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자유란다." 벤야멘타 양은 말했다. "자유란 거울 같은 것이다. 오래 견뎌내기 힘든 거야.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것처럼 몸을 항상 움직여야 한단다. 자유 안에서 춤을 춰야 해. 자유는 차가우면서도 아름답다. 다만 자유와 사랑에 빠지지만은 마라. 그건 너에게 슬픔만 안겨줄 거야. 왜냐하면 자유의 영역에서는 누구나 잠시 동안만 머무를 뿐, 그 이상 오래 머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곳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봐라. 우리가 떠다닌 저 멋진 길이 서서히 녹고 있는 것을. 이제 눈을 뜨면 자유가 소멸해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앞으로도 가슴을 조이는 이런 광경에 자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힘겹게 오른 고지와 즐거운 기분으로부터 어딘가 고달프고 슬픈 것 속으로 내려앉았다.(113~114)
Ⅲ
주인공 야콥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자아 실현'(실제로는 '자아 소멸')을 위해서 벤야멘타 하인학교 원장 벤야멘타와 함께 사막으로 가는 이야기로 끝난다.
여기서 만약 내가 산산조각이 나고 파멸해간다면, 무엇이 부서지고 파멸하는 것일까? 부서지고 파멸하는 것은 어느 영(零)일 뿐이다. 나 개인은 그저 어느 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이 펜도 던져버리는 거다. 생각하는 삶일랑 이제 집어치운다. 나는 벤야멘타 씨와 함께 사막으로 간다. 보고 싶다. 황야에도 삶이라는 것이 있는지 보고 싶다. 호흡하고, 존재하고, 정직하게 선을 추구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지 보고 싶다. 밤에 잠을 자고 꿈을 꿀 수 있는지도 알고 싶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이제부터 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신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신에 대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신은 생각하지 않는 자와 함께 간다. 자, 이제 그럼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벤야멘타 학교여.(184)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인 것은, 그의 친구 훈련생들은 모두들 일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황량함과 정적이 지배하던 그 학교에서 생각한 것, 활동하고 생활한 것 같은, 말하자면 우리의 사고와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유럽의 어느 곳을 찾아가면 하인으로서 생활하고 있을 그들에 의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Ⅳ (해설에서)
독일 문학사에도 신화가 된 작가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로베르트 발저만큼 불가해한 신화를 남긴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우선 그가 남긴 난해한 작품들에 기인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아웃사이더였던 그의 삶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는 것, 침묵하며 20여 년을 정신병원에서 살다 죽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185)
그가 태어난 스위스에서 로베르트 발저는 이미 국민 작가의 명성을 누리고 있다.(186)
그는 온갖 직업─은행직원에서 하인, 도서관 사서 혹은 비서 등─을 전전하였고 어느 누구와도 깊은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한 것은 (글)쓰기와 걷기였다.(187) 이를테면 그는 뮌헨에서 뷔르츠부르크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서 지인을 방문하지만 방문은 결코 수백 킬로미터를 걷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는 지인에게 잠시 들러 짧은 인사를 하고는 곧 다시 돌아온다.(188) 자진해서 들어간 정신병원에서 20여 년간 로베르트 발저가 한 일은 종이봉투 붙이는 일과 도보여행, 산책이었다. 1956년의 어느 겨울날 그는 산책을 나가 눈길 위를 걷다 일생을 마친다.(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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