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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프란츠 카프카 『가장(家長)의 근심』

by 답설재 2012. 4. 10.

 

 

 

 

희한한 일이다. 카프카의 여러 장편(掌編) 소설 중에 「가장(家長)의 근심」이라는 것이 있어 그걸 읽다가 '오드라덱'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고, '오드라덱이 도대체 뭔가?' 싶어 하다가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어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여러 네티즌의 언급들도 오드라덱에 관해서는 카프카의 그 소설 일부 혹은 전체를 인용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심지어 어떤 블로거는 블로그의 이름을 '오드라덱'이라고 짓고 있지만, 그 블로그를 들여다봐도 정작 오드라덱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것 자체가 바로 오드라덱의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나 또한 오드라덱의 한 가지라는 뜻이니 그게 무슨 설명이 되겠는가?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오드라덱의 의미를 왜 그렇게 궁금해하게 되었는가 하면 그 장편(掌編)소설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 이르러서였다.

 

「그럼 어디에 사니?」「아무데나요.」 하면서 그가 웃는데 그것은 폐(肺)가 없이 웃는 듯한 웃음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낙엽들(<떨어진 종이>라고도 번역된다.) 속에서 나는 서걱임처럼 울린다. 그것으로 대화는 대개 끝난다.

 

뿐만 아니고 그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까지도 그가 살아 있으리라는 상상이 나에게는 거의 고통스러운 것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 또한 카프카의 그 소설에서 오드라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 소설을 모두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만 하면 그 누구도 오드라덱이 뭔지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므로. 그래도 잘 모르겠다면 그건 말도 되지 않을 것이므로.

 

 

가장(家長)의 근심

 

 

어떤 사람들은 오드라덱이란 말의 어원이 러시아어라고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 말의 형성을 증명하고자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어원은 독일어인데 러시아어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해석의 애매함으로 미루어보아 그 어느 것도 맞지 않으며 특히 그 어느 해석으로도 이 말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옳은 추론인 듯하다.

 

물론 오드라덱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실제로 없다면, 그 누구도 그런 연구에 골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선 납작한 별 모양의 실패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노끈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노끈이라면야 틀림없이 끊어지고 낡고 가닥가닥 잡아맨 것이겠지만 그 종류와 색깔이 지극히 다양한, 한데 얽힌 노끈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패일 뿐만 아니라 별 모양 한가운데에 조그만 수평봉(棒)이 하나 튀어나와 있고 이 작은 봉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다시 봉이 한 개 붙어 있다. 한 편은 이 후자의 봉에 기대고 다른 한 편은 별 모양 봉의 뾰족한 한 끝에 의지되어 전체 모양은 두 발로 서기나 한 듯 곧추서 있을 수가 있다.

 

이 형상이 이전에는 어떤 쓰임새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깨어진 것이라고 믿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것은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그런 낌새는 없으니 그 어디에도 뭔가 그런 것을 암시하는 다른 부분이 이루어지는 곳이나 부러져 나간 곳이 없고 전체 모양은 비록 뜻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나름으로 마무리되어 있어 보인다. 아무튼 그것에 대해서 보다 상세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오드라덱이 쏜살같이 움직이고 있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드라덱은 번갈아가며 다락이나 계단, 복도 마루에 잠깐씨 머무른다. 이따금씩 몇 달이고 보이지 않다가, 그럴 때는 아마 다른 집들로 옮겨가 버린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런 다음에는 틀림없이 우리 집으로 되돌아온다. 간혹 문을 나서다 오드라덱이 마침 계단 난간에 기대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을 걸고 싶어진다. 물론 그에게 어려운 질문을 할 수는 없고, 그를──워낙 작은 생김새부터가 그렇게 하게끔 유혹한다──어린아이처럼 다룬다. 「너 대체 이름이 뭐냐?」 하고 묻는다. 그가 「오드라덱이예요」 한다. 「그럼 어디에 사니?」 「아무데나요」 하면서 그가 웃는데 그것은 폐(肺)아 없이 웃는 듯한 웃음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낙엽들('떨어진 종이'라고도 번역된다) 속에서 나는 서걱임처럼 울린다. 그것으로 대화는 대개 끝난다. 아무튼 이런 대답들조차도 늘 들을 수는 없으니 그는 대개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뭇 토막처럼, 그가 바로 그것인 듯 보이는 나무토막처럼.

 

쓸데없이 나는 그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자문한다. 대관절 그가 죽을 수 있는 걸까? 죽는 것은 모두가 그 전에 일종의 목표를, 일종의 행위를 가지며, 거기게 부대껴 마모되는 법이거늘 이것은 오드라덱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훗날 내 아이들과 내 아이들의 아이들의 발 앞에서도 그는 여전히 노끈을 끌며 계단을 굴러 내려갈 것이란 말인가? 그는 명백히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죽은 후까지도 그가 살아 있으리라는 상상이 나에게는 거의 고통스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