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연구위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드나들고 있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은, 건물 5층에 이사장과 사무국장, 과장 등의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고, 4층은 '교과서정보관'입니다. 그 정보관 한쪽에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방을 드나들며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재단의 목적에 기여하고 있는가?'
교과서정보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특유의 '냄새'가 납니다. 책들이 품어내는 그 냄새를 '향기(香氣)'라고 하고 싶지만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향기라니……' 하고 터무니없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냄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에게는 싱싱한 빵 냄새나 담배의 향기(47년을 피우고 "끊어버린" 아, 그 담배!), 혹은 커피향처럼 언제나 좋기만 하고 싫증이 나지를 않는 냄새지만, 사무실을 찾아온 어느 분에게 물어봤더니 이맛살을 약간 찌푸리면서 "별로 좋은 냄새는 아닌데요?" 한 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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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왜 냄새가 나는 걸까요?
종이가 변화하는 습도와 온도의 차이에 따라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도 하겠고, 잉크 냄새도 한몫할 것입니다. 또 책을 펼쳐보는 사람들이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그 잉크나 종이를 만들 때 때 향수를 넣기도 할 것입니다. 그 옛날,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책(당연히 교과서뿐!)을 받으면 곧 책갈피에 코를 묻고 그 향기를 맡아보려고 킁킁대었는데,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지금까지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쳐다보는 사람이 없으면 책 냄새를 맡습니다.
'이 책에서는 어떤 냄새가 날까?'
처음 나온 책이 아니라면 책에서는 또 다른 한 가지 냄새가 스며 있고, 그게 시시각각으로 솔솔 풍겨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 책의 주인이었던 사람 냄새, 혹은 그 책을 읽은 사람의 냄새입니다.
로랑 세크직의 소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책을 한 권씩 꺼냈다. 한 권 한 권 천천히 표지를 들여다보고 단면을 어루만졌다. 그다음에는 넋 빠진 사람처럼 책을 펼쳐들고 다소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코를 처박은 채 종이에서 풍기는 냄새를 들이마셨다. 이 책들은 오스트리아의 집을 떠나온 이후로 빛을 보지 못했다. 책들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장소는 카푸치너베르크 자택의 서재였다. 흘러가는 시간, 대륙을 넘나드는 여정, 대양은 그 책들의 향기를 흐트러뜨리지 못했다. 책들은 잘츠부르크 집 응접실의 냄새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냄새는 오랜 세월에 걸쳐 책장에 배어들었다. 전나무, 장작불, 가을 낙엽, 소나기가 내린 후의 흙, 담배 연기, 사과, 오래된 가죽, 페르시아 양탄자의 여인의 향수…… 그 모든 냄새들이 한데 뒤섞여 스며든 것이었다. 그는 열에 들떠 엄숙하게 몇 권의 책을 펼치고는 이어서 다른 책들에도 코를 처박기 시작했다. 콧구멍 가득 냄새를 들이마셨다. 책장들 속에 모든 것이 남아 있었다.1
물론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행위와 그가 맡은 책의 냄새를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그가 맡은 책의 냄새에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민족적, 정서적 문제가 복잡하고 드라마틱하게 얽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그 행위는 우리와 다를 바 없고, 한마디로 책에는 책을 읽은 이, 책의 주인의 냄새가 배어 있다는 설명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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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이 세상에 글을 다듬고 고치는 일, 즉 '윤문(潤文)'을 전문으로 하는, 말하자면 '윤문가'라는 직업이 있다면 내가 그걸 했더라면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글을 다듬고 고친다는 것은 너무나 힘드는 일이어서 특히 신문에 실을 짤막한 시론(時論) 한 편에 서너 시간을 투입하고 나면 진이 빠지고 맥이 풀리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직업도 필요한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물론 부자들은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 놓고는 큰돈을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이런 일의 어려움을 알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의 고하(高下)는 차치하고, '이런 것을 직업으로 하여 살아갈 수는 없나?'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책 냄새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 있으면 어떨까, 그런 공상도 해보았습니다. 공상이니까 그걸 다 이야기해 보면, 책갈피에 좋은 냄새가 스며 있어서 책을 아무리 오래 읽어도 머리가 아프지 않고, 졸음이 오지 않는 책, 오히려 보면 볼수록 머리가 맑아지고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책, 심지어 이미 마음이 거무티티하게 썩어버린 나이든 녀석은 도저히 어쩔 수가 없겠지만, 저 해맑은 아이들이라면 책을 보면 볼수록 마음씨가 밝고 명랑해지고 착해지는 책을 위한 냄새의 개발, 그러한 공정의 검사·조사·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책이라면 한 권에 가령 1만원 할 것을 1만2천 원쯤 받아도 좋을 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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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香水)』 생각이 납니다.
'향수'라면 한자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장 '추억', '그리움', '노스탤지어(nostalgia)'를 연상할 수도 있지만, 이건 그게 아니고 멋쟁이나 품위 있는 사람들이 살짝 뿌리고 다니는 그 향수(香水) 이야기입니다. 이 기막힌 소설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8세기 프랑스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이 시대에는 혐오스러운 천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천재적이면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에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였다.
픽션인데도 멀쩡하게 정말로 있었던 이야기를 쓴 것처럼 재미있고 실감이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 '향수쟁이'(향수 만드는 장인) 그르누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체취를 가진 소녀의 몸을 재료로 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향수를 만들지만, 결국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희한하게도 권리니 양심, 신, 기쁨, 책임, 겸손, 감사와 같은 단어의 표현에 대해서는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혼란을 느끼는 그는, 어렸을 때부터 냄새로는 못할 일이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후신경(嗅神經)을 통해 완전히 파악했다. 가이아르 부인의 집에서 언제나 그때그때 일회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그가 냄새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시 확인할 수 없고 기억 속에 확실하게 간직하고 있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북쪽 샤론느 거리에 있는 모든 장소, 모든 사람, 모든 돌과 나무와 숲, 그리고 울타리와 모든 얼룩의 냄새도 그는 알게 되었다. 그는 수만, 수십만의 독특한 냄새들을 수집했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아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냄새를 다시 맡았을 떄 단순히 그 냄새를 기억해 낼 뿐만 아니라 그 냄새를 떠올리면서 정말로 그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다.2
그런 그 그르누이가 소녀의 향기를 찾는 장면 중의 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정원의 향기가 오색찬란한 무지개처럼 뚜렷하고 분명하게 그에게 밀려 왔다. 그가 찾고 있는 그 귀한 향기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르누이는 쾌감으로 몸이 달아올랐으며, 또한 놀라움으로 인해 머리가 맑아졌다. 잘못을 저지르고 붙잡힌 젊은이처럼 피가 머리끝까지 거꾸로 치솟았다가 다시 제대로 흘렀다가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향기가 너무 순식간에 그를 덮쳤던 것이다. 숨을 들이쉬는 그 한 순간이 영원처럼 생각되었다.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난 것이거나 아니면 너무 빨리 흘러갔다. 그르누이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고 지금이 언제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 옛날 같고 여기가 저기 같았다. 1753년 9월 파리의 마레 거리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정원에서 흘러나오는 그 향기는 그 옛날 그가 죽였던 그 빨강머리 처녀의 향기였다. 이 세상에서 그 냄새를 다시 찾아냈다는 기쁨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그 향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끔찍한 공포가 그를 덮쳤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현기증이 났기 때문에 그는 성벽에 몸을 기댔다. 그는 천천히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덜 위험하도록 그 치명적인 향기를 짧게 숨을 쉬면서 조금씩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성벽 너머의 그 향기는 빨강머리 처녀의 향기와 거의 유사했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
어디서 끊어야 좋을지 몰라 좀 길게 옮겼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소설이 이와 같다", 그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아울러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소설가의 저런 상상이 가능했다면, 멋진 향수를 넣은 책갈피에서 그 책을 읽는 아이의 졸음을 쫓고, 머리를 맑게 해주고, 미소를 짓게 해주고, 그리하여 마음씨가 착해지게 하는 그런 책을 만들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까지는 아이들이 보는 책이나 어른들이 보는 책 중에는, 그 책을 보면 졸음이 몰려오고, 머리가 아프고, 심지어 마음씨가 고약해지는 그런 책이 많은 것 아닌가 싶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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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이 없어지느니 어쩌니 하는데도 '설마 영 없어지기야 할까?' '그래서 되겠나!' 미련을 가집니다. 책과 함께한 일생이어서인지, 아니면 책과 함께한 일생이었으면서도 아직 그 책을 읽고 싶은 것만큼 읽지 못해서인지, 지금도 책은 쳐다보기만 해도 좋고, 냄새만 맡아도 좋다는 얘기를 한다는 게 이렇게 되었습니다.
돈을 이만큼 사랑했다면 참 좋았을텐데…… 훨씬 좋았을텐데…… 지금쯤 큰소리 '떵떵' 치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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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랑 세크직, 이세진 옮김,『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현대문학, 2011), 20쪽.
2.파트리크 쥐스킨트, 강명순 옮김,『향수』(열린책들, 1991), 39쪽.
3.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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