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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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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황제의 전갈』

by 답설재 2012. 4. 3.

 

 

황제의 전갈

: 알베르 까뮈가 말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상징'

 

 

카프카 / 황제의 전갈

 

황제가──그랬다는 것이다──그대에게, 일 개인에게, 비천한 신하, 황제의 태양 앞에서 가장 머나먼 곳으로 피한 보잘것없는 그림자에게, 바로 그런 그대에게 황제가 임종의 자리에서 한 가지 전갈을 보냈다. 황제는 사자(使者)를 침대 곁에 꿇어앉히고 전갈을 그의 귓속에 속삭여주었는데 그 일이 그에게는 워낙 중요해서 다시금 자기 귀에다 전갈을 되풀이하게끔 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여 했던 말의 착오 없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임종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장애가 되는 벽들을 허물고 넓고도 높은 만곡형 노천계단 위에 제국(帝國)의 강자들이 서열별로 서 있다──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황제는 사자를 떠나보냈다.

사자는 즉시 길을 떠났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한 남자로 이켠저켠 팔을 번갈아 앞으로 뻗어가며 사람의 무리를 헤쳐 길을 트는데, 제지를 받으면 태양 표지가 있는 가슴을 내보인다. 그는 역시 다른 누구보다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사람의 무리는 아주 방대하고 그들의 거주지는 끝나지 않는다. 벌판이 열린다면야 그는 날듯이 달려올 것을, 곧 그대의 문에 그의 양주먹의 멋진 두드림 소리가 들릴 것을. 그러나 그러는 대신 그는 속절없이 애만 쓰고 있다, 아직도 그는 가장 깊은 내궁(內宮)의 방들을 힘겹게 지나고 있는데, 결코 그는 그 방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설령 그 방들을 벗어난다 해도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이니,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그는 또 싸워야 할 것이고, 설령 싸움에 이긴다 해도 아무런 득이 없을지니, 뜰을 지나야 할 것이고, 뜰을 지나면 그것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제2의 궁전이 있고, 다시금 계단들, 궁전들이 있고, 또다시 궁전이 있고, 등등 계속 수천 년을 지나 드디어는 가장 바깥쪽 문을 뛰쳐나온다면──그러나 결코,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비로소 세계의 중심, 그 침전물이 높다랗게 퇴적된 왕도(王都)가 그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 어떤 자(者)도 이곳을 통과하지는 못한다. 비록 고인(故人)의 전갈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말이다.──그런데도 그대는 그대의 창가에 앉아 저녁이 오면 그 전갈을 꿈꾼다.

 

 

알베르 까뮈의 에세이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1

 

 

카프카의 예술은 그 전체가 독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다시 읽게 한다. 그의 작품의 결말들, 혹은 결말의 부재(不在)는 여러 가지 설명들을 암시하지만, 그것들이 분명한 언어를 통해 드러나지는 않으며, 또한 그것들이 타당한 것으로 보이려면 그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읽는 게 요구된다. 때로는 이중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고, 거기서 두 번 읽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그것이 바로 그 작가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서 모든 것을 세세하게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상징이란 언제나 흔히 있는 것이며, 그 해석이 아무리 정확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술가는 거기에 그 활기밖에 되살려 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낱말을 하나하나 축어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상징적인 작품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상징이란 언제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넘어서며, 자신이 의식하고 표현하는 것보다 실제로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상징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상징을 들쑤시지 말 것, 선입관 없는 태도로써 그 작품을 대할 것, 그리고 그 숨겨진 흐름들을 찾지 않을 것 등이다. 특히 카프카의 경우에는, 카프카의 원칙들에 동의하고서, 드라마를 대할 때에는 그 외면적인 것을 통해, 소설은 그 형식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공정하다. …(후략)…

 

 

까뮈는 이 에세이에서 카프카의 《성(城)》 《심판》 《변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에세이에서라면 카프카의 작품 대부분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의 장편(掌編) 『황제의 전갈』이 그 예이다.2 이 장편(掌編)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까뮈가 부탁한 대로 다시 읽으며 마침내 편안한 마음이 되었고, 짧은 소설을 읽는데도 여러 가지 얘기가 떠올라서 저 몇 문장을 아주 한참동안 읽고 있었다.

 

 

 

<蛇足>

카프카는 왜 그랬을까?

이 작품 「황제의 전갈」을 「만리장성의 축조 때」라는 작품에도 삽입시켜 놓았다. 「황제의 전갈」부분 바로 앞의 문단은 이렇다.

 

…(전략)…

워낙 우리 땅이 넓다, 동화도 그 크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하늘도 그걸 다 덮기 어려우니──북경은 다만 하나의 점 그리고 황성은 한층 더 작은 점일 뿐이다. 황제 그 자체는 아무튼 다시금 세계의 모든 층을 뚫고 우뚝 솟아 있다. 그러나 살아 있는 황제,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은 우리들과 비슷하게, 넉넉하게 만들기야 했겠지만 아마도 좁고 짧을 뿐일 하나의 휴식용 침상에 누워 있다.

…(중략)…

그러나 황제 하나하나는 쓰러지고 추락하고, 전체 왕조 자체가 드디어 침몰하여 오로지 그르렁거림으로써 잠깐씩 숨을 돌린다. 이러한 투쟁들과 병고(病苦)들의 이야기를 백성들은 결코 듣지 못한다. 너무 늦게 온 사람들처럼, 도시가 서먹서먹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찬 옆 골목 끝에서 조용히 싸온 음식을 먹어가며 서 있다, 멀리 저 앞쪽 광장 한가운데서는 그들의 주인의 처형이 이루어지는 동안에.

이 관계를 잘 표현한 설화가 있다.

(황제의 전갈 : 전문)

꼭 그렇게, 그렇게 희망 없고 또 그렇게 희망에 차서, 우리 백성은 황제를 본다. 어느 황제가 통치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또한 왕조의 이름마저 확실하지 않다. 학교에서는 그 비슷한 많은 것을 순서대로 배웠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너나없이 워낙 불확실하다 보니 최우수생마저도 불확신에 휩쓸리게 된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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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부록 1.「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167~183쪽)의 첫머리.

2. 프란츠 카프카, 「황제의 전갈」(전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변신·시골의사』(전영애 옮김, 2009 1판 47쇄) 189~1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