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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W.G. 제발트 『이민자들』 Ⅰ

by 답설재 2012. 7. 8.

 W.G. 제발트 『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이민자들』은 네 편의 단편을 엮은 책입니다.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그 중 세 편이 유대인들이 독일인들로부터 받은 박해에 대한 기록 형식의 소설입니다.

W.G. 제발트가 이 소설을 기록 형식으로 쓴 것은, 독자들에게 이건 진실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기록보다 더 기록적인 소설이 되어서 읽는 내내 '이건 사실은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저 표지에도 <W.G. 제발트 소설>이라고 '소설'임을 명기하고 있겠습니까.

 

 

 

전직 의사 헨리 쎌윈 박사는 부유한 아내와 결혼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다가 끝내 자살하고 맙니다. 이것이 『이민자들』의 첫 번째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은 아주 서정적이고 우수어린 기록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결코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참을성 있게 진지하며 조용합니다. 그러한 형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내용이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쎌윈 박사가 죽기 전에 내방객에게 보여준 저택의 정원은, 그 자신의 몰락을 상징하듯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곳이었으나, 잘 가꾸어진 정원보다는 오히려 '야생을 되찾은 정원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나 자신이 여기저기 대충 씨를 뿌리고 심어놓은 것이 빼어난 맛을 낸다'고 설명하는 장면(15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 같고, 그런 생활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킵니다.

 

 

 

쎌윈 박사는 늦가을 어느 날, 가지고 있던 사냥총으로 자살합니다. 그 장면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듣게 된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총을 두 다리 사이에 세우고 총신 끝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인도로 가기 전에 그 총을 산 이래 처음으로 목표물을 죽일 생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물론 끔찍한 감정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흉흉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랫동안 잊은 후에도 갑작스럽게 느닷없이 다시 떠오르는 법이다. 나는 날이 갈수록 이런 사실을 더 뚜렷하게 실감하고 있다.(34)

 

또 그가 왜 몰락했고 죽음의 길을 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쎌윈 박사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코 유대인의 피를 받아서였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아니면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줍니다.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군요. 돈일 수도 있고, 결국 발각되고 만 내 혈통에 대한 비밀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그저 사랑이 식어서일 수도 있겠지요.(33)

 

 

 

W.G. 제발트의 소설을 읽으며 생각난 것은, 유대인들이 독일인으로부터 받은 박해에 대해서는 수많은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것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독일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가 다시 군국주의국가가 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해도 절대로 유대인들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후손들에게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저 유대인들로부터 징계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징그러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매우 단호한 태도로 이렇게 말할 날이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너희를 괴롭혔나? 도와주려고 한 것 아닌가? 괴롭혔다면 증거를 대어보라!"

 

이 책에는 이런 얘기도 들어 있습니다.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