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G. 제발트 『이민자들』
이재영 옮김, 창비, 2008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이민자들』은 네 편의 단편을 엮은 책입니다.
「헨리 쎌윈 박사 : 기억은 최후의 것마저 파괴하지 않는가」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그 중 세 편이 유대인들이 독일인들로부터 받은 박해에 대한 기록 형식의 소설입니다.
W.G. 제발트가 이 소설을 기록 형식으로 쓴 것은, 독자들에게 이건 진실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호소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기록보다 더 기록적인 소설이 되어서 읽는 내내 '이건 사실은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저 표지에도 <W.G. 제발트 소설>이라고 '소설'임을 명기하고 있겠습니까.
♣
전직 의사 헨리 쎌윈 박사는 부유한 아내와 결혼하여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고, 지독한 향수에 시달리다가 끝내 자살하고 맙니다. 이것이 『이민자들』의 첫 번째 이야기의 줄거리입니다.
소설은 아주 서정적이고 우수어린 기록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결코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참을성 있게 진지하며 조용합니다. 그러한 형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 내용이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쎌윈 박사가 죽기 전에 내방객에게 보여준 저택의 정원은, 그 자신의 몰락을 상징하듯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진 곳이었으나, 잘 가꾸어진 정원보다는 오히려 '야생을 되찾은 정원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나 자신이 여기저기 대충 씨를 뿌리고 심어놓은 것이 빼어난 맛을 낸다'고 설명하는 장면(15쪽)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것 같고, 그런 생활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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쎌윈 박사는 늦가을 어느 날, 가지고 있던 사냥총으로 자살합니다. 그 장면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듣게 된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총을 두 다리 사이에 세우고 총신 끝에 턱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인도로 가기 전에 그 총을 산 이래 처음으로 목표물을 죽일 생각으로 총을 발사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물론 끔찍한 감정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흉흉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아주 오랫동안 잊은 후에도 갑작스럽게 느닷없이 다시 떠오르는 법이다. 나는 날이 갈수록 이런 사실을 더 뚜렷하게 실감하고 있다.(34)
또 그가 왜 몰락했고 죽음의 길을 갔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쎌윈 박사의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코 유대인의 피를 받아서였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아니면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해줍니다.
무엇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군요. 돈일 수도 있고, 결국 발각되고 만 내 혈통에 대한 비밀일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그저 사랑이 식어서일 수도 있겠지요.(33)
♣
W.G. 제발트의 소설을 읽으며 생각난 것은, 유대인들이 독일인으로부터 받은 박해에 대해서는 수많은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그것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독일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럴 리는 없지만, 우리가 다시 군국주의국가가 되어 다른 나라를 침략한다 해도 절대로 유대인들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후손들에게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 지금 우리가 저 유대인들로부터 징계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징그러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매우 단호한 태도로 이렇게 말할 날이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언제 너희를 괴롭혔나? 도와주려고 한 것 아닌가? 괴롭혔다면 증거를 대어보라!"
이 책에는 이런 얘기도 들어 있습니다.
「파울 베라이터 : 어떤 눈으로도 헤칠 수 없는 안개무리가 있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 내 밀밭은 눈물의 수확이었을 뿐」
「막스 페르버 : 날이 어둑해지면 그들이 와서 삶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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