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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이지영「23/맬랑콜리」-나는 왜 사는가

by 답설재 2012. 8. 6.

 

 

 

시골로 거처를 옮긴 동기생이 올라와 점심을 함께하며 "요즘은 의술이 좋아서 시골에서도 오래 산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삼촌 문병을 갔는데, 칠십대인 그 삼촌이 자리에 누워서 '큰일은 자신이 앓아 누운 것이 아니라 요양원에서 호스로 식사를 하는 구십 대의 아버지가 문제'라는 거야. 앞으로 언제 죽을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거지."

 

전기가 흐르도록 전선을 이어주는 것처럼 병원에서는 아픈 곳을 찾아내어 그곳을 확실하게 고쳐주니까 노인들이 자리에 누워서도 얼마든지 목숨을 연장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친구와 나는, 무턱대고 오래 사는 것의 무의미함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나나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얘기들을 되돌아보면 이런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가장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90대이고, 그 다음이 80대, 70대이다.

◦ 우리는 60대 후반이니까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아니, 우리에게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때가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거론할 필요도 없다.

◦ 병석에 누워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현상은 하나의 사회문제가 될 것이다.

 

정말 그럴까요? 아니, 모두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고 있는 걸까요?

 

이 글은, 사실은 우리 사회의 어떤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쓰는 것은 아닙니다. 순전히 나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쓰는 글입니다. 그 점을 늦기 전에 밝혀 둡니다. 그러므로 공연한 오해를 하지는 마십시오.

 

 

 

의술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심장병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나도 의사가 이어준 목숨으로 잘난 체하고는 있지만, 얼마 전이었다면 저승으로 간지 이미 한참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약도 먹고 운동도 좀 하고 딴에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이 정도 노력은 지금까지 멋대로 살아온데 비하면 값싼 댓가일 것입니다.

 

이렇게 앞으로 또 2, 30년이 지나면 우리의 의술은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동네 약국에 쫓아가 감기두통약 얻어오듯이, 마치 하수구 막힌 것을 뚫는 기구나 약물을 사오듯이 심장에서 나오는 핏줄 막힌 걸 단번에 뻥 뚫는 약을 사올 수 있고, 1년에 한번 쥬스처럼 마시는 간편한 물약 한 병이면 일체의 암 걱정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아, 많은 여성들의 관심은 자신이 소녀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까짓 것도 앞으로는 초등학교 숙제 정도나 될까요? 외모(피부)를 십대나 이십대처럼 만들어주는 요즘의 그따위 '보톡스'니 뭐니 하는 거추장스러운 주사는 사라져버리고, 동네 수퍼에서 동전 몇 닙에 살 수 있는 알약 한 알 혹은 드링크 한 병이면 거뜬해질 것입니다. 그 알약이나 드링크를 먹고 할머니와 어머니, 딸과 며느리가 외모는 모두 소녀처럼 해가지고 마주 바라보면서 호호거리면, 우리는 어느 게 할머니이고 어느 게 소녀인지 알아보기가 영 어려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병이 걸린 사람은 어쩌다가 볼 수 있는 '아주 재수 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늙지도 않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참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그린 단편소설을 읽었습니다(이지영1, 「23/맬랑콜리」 『현대문학』 2011.11월호, 77~96쪽). 위에서 그려본 그런 '아름답고 좋은 세상'의 한 남자가 아직 그런 세상으로 변하지 않은 어느 외딴 섬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한 여성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에서 몇 군데를 옮겨보겠습니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에서 감정을 관장하는 영역을 찾아낸 이래 인류는 감정을 극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감정극복은 역사상 가장 비약적인 발전으로 여겨진다. 바야흐로 이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의 시대가 열림에 따라 우발적 살인과 폭행, 술에 취한 상태에서 행한 성폭행 및 성희롱, 객기로 앞장선 시위와 기물파손 등의 사건이 사라졌고 사랑, 오열, 대화, 만취, 희망 등의 말은 죽은 언어가 되었다.(79)

 

감정을 극복한 인간, 그리하여 열리게 된 이성의 시대라…… 그런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여기겠습니까? 마치 세상의 변화('발전'인가요?)를 조롱하는 것 같진 않습니까? 동의하건 말건, 좋아하건 말건, 어쩌면 세상은 이미 그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가 아닐까요?

그렇게 된 세상에서는 암 따위로 죽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외딴 섬에는, 예전에 전기나 수도가 들어가지 않은 마을이 있었던 것처럼, 아직 그런 문명이 도입되지 않아서 23이라는 아가씨가 암에 걸렸습니다. 병을 모르는, 그러므로 죽음도 모르는 한 인간(話者)이 그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죽음은 얼마나 신선하고 고마운 것이겠습니까.

 

23은 말기 암 환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서서히 병들어 죽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어간다는 것 역시 현재는 사라진 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모든 병을 극복한 이후 사람들은 잘 죽지 않았다. 늙어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을 의미했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으며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를 하룻밤 사이 아기 피부로 바꿔주는 영양크림은 다 쓰러져가는 구멍가게에서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서 죽음은 갑작스러운 죽음밖에는 없었다. 사고가 나 미처 손을 써볼 사이도 없이, 의사는커녕 구조대원조차 만나기 전에 숨을 거두는 것만이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문명의 발달이 사람들에게서 유언과 임종을 앗아간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23을 통해 서서히 죽음에 이르는 인간과 곁에서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죽음을 함께 경험하는 인간의 모습을 모두 관찰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89).

 

 

 

얼른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까?

아, 그러면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매일 아침 챙겨 먹어야 하는, 그걸 잊으면 저기쯤 나갔다가도 되돌아가 먹어야 하는, 귀찮은 심장약 따위를 잊고 살 수도 있고, 배우자보다 수명이 훨씬 길어서 홀로 남아 몸도 움직일 수 없는 병이 들면 요양원이라는 곳으로 떠나는 서글픈 일도 일어나지 않겠군요. "구구팔팔"이니 뭐니 하며 백세 시대를 갈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 꿈과 같은 세상의 일원이 되겠군요.

 

그런데 이 소설의 화자(話者)는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알약을 숨기고 그 알약을 말기암 환자인 그녀에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 이유를 애써 설명하기보다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 일부를 옮기겠습니다.

 

나는 23의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들에게 또 다른 이별을 경험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23의 죽음만을 한 권의 책으로 펴낼 계획을 세웠다. 스무 살에 암으로 죽음에 이르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남자의 사랑 이야기는 책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도 재생산되어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판권을 얼마 정도에 넘겨야 할지, 그 돈으로 무엇을 가장 먼저 할지 생각하며 바다를 향해 걸었다.

바닷가까지 오솔길이 나 있는 섬은 지금껏 발견된 열아홉 개의 다른 어떤 섬보다도 아름다웠다.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가 발견한 이 섬을 외부와 접촉하지 않는 유일한 섬으로 보호할 것이다. 이곳에 들어오기를 간곡하게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엄격한 선발을 거쳐 통제하에 들여보낼 수도 있겠지만 아주 비싼 값을 치러야만 가능할 일이다(96).

 

 

 

나는 뭘 잘못했는지, 무슨 긴 꿈을 꾸었는지, 어제까지 오십대였던 것 같고, 몇 달 전까지 사십대 였던 것 같은데, 어느덧 육십대 후반입니다. 그것도 병이 들어 매일 약을 먹어야 합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더니 정수리 부분은 빠지기 시작했고, 어?, 어?, 하는 사이에 지금은 아주 아무것도 없어 호텔에서 화투치는 중들(자기네 호칭으로는 "스님들") 머리처럼 발갛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그런 것 신경쓰지 말고 아예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라고 하는데, 처음엔 장난으로 들리던 그 말이 이젠 그렇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세월이 간 걸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앞으로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럼, 나는 지금 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①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으므로 (×)

② 지금 죽으면 누가 봐도 억울하니까 (×)

③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어서 (×)

④ 지금 죽으면 너무 슬퍼하여 정신줄을 놓을 사람이 있어서 (×)

⑤ 제2의 인생을 개척하여 국가·사회에 공헌할 기회가 다시 올 수도 있으니까 (×)

 

그렇다면 나는 지금 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시지프의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2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 속에는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불행보다도 강한 무엇이 있다. 육체의 판단은 정신의 그것과 다름 없는데, 육체는 소멸을 꺼리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습관을 얻기 전에 먼저 살아가는 습관에 빠지게 된다. 나날이 죽음을 향해 우리를 재촉하는 이 경주 속에서 육체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우선권을 지니고 있다.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저 길가의 한 마리 벌레나 다름없는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덧붙이거니와 이 글에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 거북한 점이 있다면, 그건 이 글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사실은 얼른 노인들 쪽으로 달려가서 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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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지영 : 1989년 서울 출생. 동국대 문창과 졸업. 2010년 『현대문학』 등단.
2. 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20~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