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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향수(鄕愁)

by 답설재 2012. 6. 13.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까지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래도? 이래도 네가 별것 아니라고 여길 테냐?' 그렇게 나를 마음껏 조롱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별것 아닌 것 중의 한 가지가 예전에 살던 곳에 대한 기억입니다.

 

전날 저녁 쎌윈 부인은 우리에게 곁채의 이층에 있는 방을 보여주었다. 가구들은 좀 별스러웠지만, 그것만 빼면 아주 훌륭하고 큰 방이었다. 그 방에서 앞으로 몇달간 지낼 생각을 하니 우리는 금세 기분에 좋아졌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정원과 공원, 하늘 위에 수평으로 길게 펼쳐진 구름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런 전망은 실내장식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큼 멋졌으니 말이다. 눈길을 그저 창 쪽으로 돌리기만 해도 등뒤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잊을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W.G. 제발트의 소설 『이민자들』(창비, 2008, 15~16)에서 위 부분을 읽으며 문득 1980년대의 그 아파트가 생각났습니다.

 

 

 

'앞산' 기슭의 남향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비로소 내 명의로 갖게 된 아파트였고, 서울로 이사오기 전에 5년 반을 살았습니다.

 

9동 302호는 거실의 커다란 창 너머로 '앞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그대로 다 보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보였고, 그림이 똑같은 날이 하루도 없어서 언제나 볼 만한 풍경화였는데 찬란한 그 모습을 이런 표현력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가 없으므로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풍경화를 단 한 번도 제대로 감상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무엇이 그리 바쁘고 어렵고 복잡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다 자신의 허물일 뿐이긴 하지만, 몇 가지를 빼고는 대부분 어차피 겪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쓸데없는 얘기를 해본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새로 시작해 보고 싶긴 합니다.

 

한 가지 가슴아픈 일이 더 있습니다.

그 집을 팔 때 새로 임자가 될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보세요. 이 아파트 거실은 한 폭의 거대한 그림입니다. 그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 그려집니다. 적어도 몇백만 원짜리는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당장 그 그림값으로 500만원을 따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가슴아팠습니다. 5년 반 동안 그 그림을 한번 자세히 쳐다보지도 못한 주제에 그림값이라며 당시로는 제법 큰돈을 챙겼으니…… 그때 이미 이쪽은 돈에 눈이 먼 인간이 되어버리고(그래봤자 결국은 이렇게 살게 될 것을……), 그 집을 산 사람은 그림값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동이 틀 무렵 그 영혼이 과거에 머물렀던 곳, 즉 젊었을 때의 학교와 기숙사, 군대 막사와 주택, 허물어졌다가 다시 지어진 집들, 그리고 사랑과 회한, 힘들었던 일들과 행복했던 일들, 희망과 희열로 가득했던 일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들을' 둘러보게 된답니다(테이아 오브레트, 왕은철 옮김, 『호랑이의 아내』(현대문학, 2011.9월호, 228~229).

 

그러면 나는 조만간 그곳을 한 번은 더 가보게 될 것입니다.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전 교육부장관)의 블로그 『현강재』에 실린 「서재 창문에 비친 울산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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