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아토피

by 답설재 2012. 6. 15.

 

 

 

 

 

아토피

 

 

 

 

 

 

 

 

  'But now the court has fallen into disrepair, like so much else around here(하지만 여기 다른 곳들도 대개 그렇듯이 이젠 테니스장도 황폐해졌습니다).' 그는 상당히 파손된 빅토리아 양식의 온실과 멋대로 자라난 나무울타리를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몇년 동안 돌보지 않았더니 채마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부담을 너무 많이 줬던 자연도 그냥 저렇게 방치해두었더니 신음소리를 내며 점점 함몰되는 중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많은 식솔들이 먹을 음식을 소출할 목적으로 이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으며, 한때는 노련한 기술로 재배한 과일과 야채를 일년 내내 수확할 수 있었다고 했다. 요즘은 거의 관리를 해주지 못하는데도 쎌윈 박사 자신이 먹을 것쯤은 거뜬히 채우고도 남을 만큼 여전히 넉넉하게 길러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하긴 그가 먹는 양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때는 모범적으로 관리되던 정원이 황폐해져서 좋은 점도 있다고 쎌윈 박사가 말했다. 야생을 되찾는 정원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나 자신이 여기저기 대충 씨를 뿌리고 심어놓은 것이 빼어난 맛을 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깨높이까지 왕성하게 자란 아스파라거스들이 모여 있는 채소밭과 줄지어 선 커다란 아티초크 덤불 사이를 지나 사과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사과나무에는 주황색 열매들이 수없이 달려 있었다. 실로 내가 그때까지 맛본 그 어떤 사과보다 맛이 좋았는데, 쎌윈 박사는 그 사과 여남은 개를 대황잎으로 싸서 클라라에게 선물했다. 그러면서 그 사과 종은 뷰티 오브 배스(목욕의 아름다움──옮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아주 그럴듯한 이름이라고 했다.1

 

 

 

 

  새벽에 일어나서 지난밤 꿈을 떠올리고, 요즘 읽고 있는 소설에서 위 부분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무슨 꿈이냐 하면,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 뭔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하면 탈이 나는 것이다"

  "아토피는 공기가 자연스럽지 못해서 일어나는 질병이다"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비정상적 현상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일어나는 질병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고약할 것인가", "얼마나 심각할 것인가"

  주변을 살펴보며 그런 내용들을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생각해보았더니, 일전에 EBS 방송에선가 아기들의 아토피에 대한 프로그램을 본 영향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이 가려워하는 모습, 얼굴과 온몬에 진물이 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아픈 일이었습니다. 그 아기들이 도대체 무얼 잘못한 것입니까?

  그런 눈으로 보면, 저 학교폭력인가 뭔가는 누가 잘못해서 일어나는 '질병'인지도 한번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걸 따져서 그 근본원인부터 제거해야 치유될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 일이 다 자연스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피부나 정신이나 마음의 아토피가 사라질 것입니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예전에 다녔던 그 길이 어느덧 '황폐해져서'(푸나무가 뒤덮어버려서)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다녔었는지 구분도 되지 않는 그 시골길 같은 것이 아닐까요? 또 우리가 다녔던 그 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건 결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러므로 도시의 길들은 아예 전혀 자연스러울 수가 없는 것이겠죠.

  좀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지요.

 

 

 

 

  알베르 까뮈는 이렇게 썼습니다.2

 

  우리가 택해 온 것들은, 오히려 위대함을 흉내내는 일, 첫째로 알렉산더, 그 다음에는 우리의 교과서 저자들이 더할나위 없는 어떤 비속함으로 우리에게 찬미하도록 가르치는 로마의 정복자들이다. 우리 역시, 정복하고, 국경을 옮기고, 하늘과 땅을 지배해 왔다. 우리의 이성은 모든 것을 쫓아 버렸다. 마침내, 우리는 혼자서 한 사막을 지배하는 것으로 끝난다. 자연이 역사·아름다움·덕(德)을 균형잡고, 피의 비극에까지 규칙적인 음악을 적용하는 보다 고차원적인 그 평형을 위해 우리가 무슨 상상력을 남겨 놓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자연에 등을 돌리고, 아름다움을 부끄러워한다. 우리의 처참한 비극들은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사무적인 냄새를 풍기고, 그 비극들에서 방울져 나오는 피는 인쇄 잉크의 빛깔이다.

 

 

 

 

 

 

  1. W.G. 제발트, 이재영 옮김, 『이민자들』(창비, 2008), 14~15쪽.진한 글씨는 제가 강조하여 읽고 싶은 부분입니다. [본문으로]
  2. 알베르 까뮈, 「헬레네의 추방」(철학 에세이) 중에서,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부록 233쪽. [본문으로]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짓말을 자꾸 하면  (0) 2012.06.28
노인·늙은이  (0) 2012.06.21
향수(鄕愁)  (0) 2012.06.13
중들의 사고방식  (0) 2012.06.01
다 버리고 절에 들어갈까?-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0) 2012.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