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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노인·늙은이

by 답설재 2012. 6. 21.

 

 

 

 

 

"노인" "늙은이"

 

 

 

 

 

  서울시가 공식 문서나 행사에서 '노인'이란 말을 안 쓰기로 했다고 한다. 한창 의욕을 갖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거나 살아가는 분들을 예전처럼 '노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시민들을 상대로 '노인'을 대체할 말을 공모해 우선 '노인복지관' '경로당' '서울시노인복지과' 같은 이름부터 바꾸기로 했다.

 

                                                                                         - 조선일보, 2012.6.19,A34, 萬物相 「'노인' 考」 중에서.

 

 

 

 

  행정적으로 만 65세 이상이 '노인(老人; 늙은이)'이라면, 나는 <서울의 노인>이 아닌 것이 다행스럽다. 그러나 곧 다른 곳에도 그 바람이 불어오겠지. 그러니까 내게는 그때까지 유보된 거지.

 

  '노인'을 '노인'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건,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다는 걸 반영한 조치에 분명하다.

  우길 것 없다. 거리에 나가보면 안다. 노인을 대우하지도 챙겨주지도 않으니까 노인들 스스로 자신을 추스려야 한다. 그러다보니까 노인끼리도 각축전이 벌어진다.

 

  그럴 땐 체면이고 예절이고 뭐고 없다. 전철역에 나가면 볼 수 있다. 전철역 엘리베이터를 타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다. 오전에 교외로 나가는 전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짜 전철애 일상을 맡겨야 하는 초로(初老) 노인들이 얼마나 많으며, 멀리 교외로 나가는 그 전철에서 자리에 앉아 가려는 의도를 어떻게 나타내는지 볼 수 있다.

  그 꼴이 보기 싫은 노인이 어떻게 하는지도 볼 수 있다. 아예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눈치를 보고 싶지도 않아서 출입구 쪽에 서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서글프다.

 

  '다문화가족' 문제, '노인' 문제가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특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그걸 인식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제 노인은 어떻게 해서 무얼 먹고 사나?

  그 몸을 어디에 어떻게 눕히나?

  어디에 있어야 사람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나?

 

  '노인'을 '노인'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니, 어디서 희한한 이름이나 갖고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렇게 하면 쑥스러워서 단 하룬들 어떻게 살아갈까……

 

 

 

 

  조금의 순진 무구함도 없는 사랑은 없다. 순진 무구함은 어디에 있었는가? 여러 제국들은 무너지고 있었고, 여러 민족들과 인간들은 서로 목을 찢고 있었고, 우리의 손은 더럽혀졌다. 원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순진 무구했던 우리가 이제는 그러고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불가사의는 우리의 인식과 함께 커져 가고 있었다. 바로 그 때문에, 오, 가소로움이여, 우리는 도덕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약하고 무능력해진 내가 미덕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순진 무구했던 시절에는, 나는 도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이제야 나는 그것을 알았지만, 그것에 맞춰 살 수가 없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철학 에세이 「티파사로 돌아오다」(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 육문사, 1993, 부록, 241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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