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들의 사고방식
SBS TV 프로그램 '궁금한 이야기'에서 중들이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어쩌다가 그 프로그램을 보게 됐는지 후회스러웠고, 중간에 그만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기가 막혀 하면서 다 보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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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호텔 방에서 도박을 했을까요? 차라리 조용한 법당에서 했다면 그래도 낫지 않았을까요?
- 어느 중이 카메라 앞에서 억대 도박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겨우 몇십만 원씩이었답니다. 그게 적은 돈이란 뜻입니까? 중들의 그 돈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겨우 몇천 원 부끄러운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내놓은 사람들 허파 뒤집어지는 꼴을 봐야 하겠습니까? 서민들의 돈이 아니고 부자들이 특별히 시주한 돈입니까? 그래서 그렇게 쓸 수 있는 돈입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하니까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 심심해서 했답니다. 뭐가 그리 심심했을까요? 심심하면 낮잠을 자든지, 불경을 외워보든지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니, 중이 되면 심심할 줄 몰랐습니까?
- "중들은 똥도 싸지 않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막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막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좀 물어봅시다. 중들도 똥을 싼다면 그럼 도대체 우리와 뭐가 다릅니까?
- 잠깐 그렇게 하고 걸려든 것은 억울하답니다. 그게 억울하면 지금 유치장이나 감옥에 갇힌 사람 치고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술 마시고 노름도 하는 중이 어떻게 법규도 모릅니까?
- "중들이 지켜야 하는 계율이 너무 엄격하다는 말이 벌써부터 있었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렇게 걱정했습니까? 중들이 스스로 그렇게 말했습니까? 신도들이 "아이구, 중들이 저렇게 엄격한 생활을 해서는 쓰나!" 하고 걱정했습니까? 중들이 그랬다면, 그럼 아예 사바세계의 우리처럼 살면 좋겠다는 뜻입니까? 저는 술도 끊었고, 담배도 끊었고, 더구나 노름은 하지 않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럼 뭘 합니까? 중은 저 같은 녀석 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니까, 부처님 말씀을 잘 실천하는 게 중이니까 그럼 그게 부처님 말씀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까? 말하자면 사내 중은 그런 것도 해봐야 합니까?
- 속죄의 뜻으로 108배를 한답니다. 그 장면은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님께 절하는 것이 뭐가 부끄럽습니까? 그리고 108배는 그럴 때 하는 것입니까? 중들은 그렇게 합니까? 형편없는 짓 하고 108배 하면 그만입니까? 그럼 우리도 노름하고 술 마시고 계집질하고 사기치고 행패부리고 도둑질 하고 온갖 짓 다하고 108배 하면 됩니까? 괜찮아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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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프로그램을 다시 보면 할 말이 얼마든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생각나는 것만 몇 가지 적었습니다.
이렇게 쓰면서, 그동안 나처럼 더러운 인간은 스님들 하고는 대화를 하는 게 불가능하고, 나 같은 주제는 그저 말씀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이런 수준이라면 나도 중들과의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은 용맹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번 덤벼볼 만하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국회에서 청문회할 때처럼 일문일답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자신감이 샘솟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제 마음까지 상한 건 아니니까 까짓거 괜찮습니다. 언제는 그런 것들 믿고 살았겠습니까?
부처님 봐서 눈감고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가끔 절에 가면 그 중들일랑 외면하고, 부처님 뵙고 총총 돌아오면 될 것입니다.
한때 절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스님들을 깊이 존경하고, 그분들의 생활을 동경했습니다. 그건 「가끔 절에 가서」라는 제 글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절에 가서」 바로가기 http://blog.daum.net/blueletter01/7637560
에이, 불쌍한 중생들………… 칠칠치 못한 것들………… 한참 더 배워야 할 못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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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고 다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저 중들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하고 싶은 글입니다.1
사막의 석가모니를 생각해 보라. 그는, 사막에서 눈을 하늘에 둔 채 꼼짝 않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몇 년 간을 똑바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신(神)들은 그의 지혜와 돌 같은 숙명을 질투했다. 내밀어진 그의 두 손에다 제비들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날, 먼 나라들의 부름에 답하여 제비들은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욕망과 의지와 명예와 고뇌를 눌러 왔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바위 위에서 꽃이 피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 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돌을 받아들이기로 하자. 우리가 여러 얼굴들에게서 구하는 그 비밀스러움과 그 광희는 또한 돌에 의해서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속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영속될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얼굴들의 비밀스러움은 시들어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욕망의 사슬로 되돌아가 있다. 그리고 돌이 우리에게 인간의 가슴보다 더 많은 것을 해 줄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가슴만큼은 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오, 무(無)로 돌아가리라!」 이 커다란 외침은 수천 년 동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욕망과 고통에 반항하도록 일깨워 왔다.
더 읽고 싶으면 알베르 까뮈의 철학 에세이 「미노토르──오랑에서의 체류」를 찾아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들이 되겠습니까? 우리도 거의 읽으나마나인데…………
- 알베르 까뮈, 「미노토르──오랑에서의 체류」(철학 에세이),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범문사, 1993), 부록, 22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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