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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말기암 앓는 한국교육

by 답설재 2012. 1. 19.

'10대 안의 악마'라는 신문기사를 읽고 쓴 「'10대 안의 악마'라니요?」라는 제 글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이렇게 하지 말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합시다. 기본계획부터 새로 세웁시다." 그런 움직임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하고 싶은 말은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걸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게는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없는 공부도 필요하다느니, 그 따위 쓸데없는 소리 좀 제발 그만합시다.

 

 

 

 

그러나 한 달이 가깝도록 지켜봐도 학교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는 내용, 아이들을 더 혹독하게 다루고 잘못을 저지르면 생활기록부에 잘 기록해 두어야 하며, 이제부터는 경찰력을 동원해서 잘 살펴봐야 한다는 내용, 비행 신고를 접수하는 전화번호를 통합관리하자는 내용 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가, 우리가 잘못해서 저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학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은 많으며, 더러는 이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는 걸 지적합니다.

 

그러다가 "내 생각도 그렇다." "내가 쓴 「'10대 안의 악마'라니요?」라는 글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고 해야 할 기사를 봤습니다. 최재천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인터뷰 내용입니다(문화일보, 2012.1.13.29~30면, 인터뷰 = 박민 전국부장 minp@munhwa.com). 인터뷰 내용에 대해 기자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의 제목을 붙였습니다.

 

- "인간만큼 배타적인 種 없어… 그래서 소통·공감 더욱 중요"

- "현재 교육은 말기癌… 차기 대통령은 '교육 대통령' 돼야"

 

 

 

 

 

"현재 교육은 말기癌… 차기 대통령은 '교육 대통령' 돼야"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최근 학교폭력 문제가 최대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교육자로서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왕따문제를 왕따문제로(만 파악해) 해결하려 하면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학교 전체를 바꿔 달라는 뚜렷한 신호로 보고 교육제도 자체를 바꿔야 합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싶게 만들어야 풀리는 문제지 가해자 처벌 강화 등의 방식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됩니다. 교육문제 전반을 수술해 주다 보면 저절로 왕따문제는 없어지거나 상당히 줄어들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고등학생 전체가 다 똑같은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본교육은 분명히 해야 하겠지만 모두가 똑같은 과목을 다 배워 그 결과로 서열을 매겨 가지고 사회 진입시켜야 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다음 대통령은 무조건 복지 대통령이라는데 복지는 누가 가장 달콤한 얘기를 잘하느냐로 결정됩니다. 그런데 사실 복지의 종결은 교육입니다. 저는 다음 대통령은 교육 대통령이었으면 좋겠어요."

 

"말기암" 얘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표현은 다른 응답에서 나왔습니다.

 

― 복지라는 게 우선순위나 자원의 배분비율도 있는데 지금은 거의 포퓰리즘 수준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하는 얘기로 고기 잡아주는 게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고 하는데 교육을 제대로 하면 궁극적으로 복지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될 겁니다. 제가 최근 위원회에 몇 번 참석해 우리 교육을 들여다보니 막연하게 망가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 말기암 수준입니다. 지금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애를 쓰고 있지만 1년 후면 다른 양반이 와서 되돌리거나 다른 걸 할 텐데 이래선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다음 대통령은 다른 문제는 총리에게 맡기고 취임 첫날부터 5년 내내 교육개혁을 끈질기게 추진해야 수술이 가능한 수준이라도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은 다 옳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 이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옳은 이야기를 듣기만 해야 합니까? 

앨빈 토플러는, 이미 30년 전에, 읽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제3의 물결』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앨빈토플러, 유재천 역, 주우, 1983, 24판, 49쪽).

 

노동의 터전이 논밭과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짐에 따라 아이들은 공장노동에 적응하는 교육을 받을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 그래서 나타난 것이 모든 제2의 물결의 사회에 공통된 또 하나의 주요한 구조인 대중교육(Mass-education)이다.

 

교육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이 설명을 인용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미 1980년에 그렇게 썼으므로 이미 30년이 지나버린 옛날의 그 지적을, 오늘 우리 교육이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어진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공장을 모델로 해서 설립된 대중교육은 초보적인 읽기와 쓰기, 산수(算數)를 중심으로 해서 역사와 그 밖의 과목도 극히 간단하게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교과과정일 뿐 그 배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교과과정이 있었는데 이것이 산업사회의 기반으로서 훨씬 중요했다. 이 교과과정은 세 개의 덕목(德目)으로 되어 있다. 대개의 산업주의 국가에서는 지금도 이 세 가지가 덕목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첫째 시간 엄수, 둘째 복종, 셋째는 기계적인 반복작업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우리 교육에서의 '시간엄수' '복종' '기계적인 반복작업'이라면 누가 누구에게 그렇게 시키고 있습니까?

교장이 교사들에게?

그럼,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어쨌든 '시간엄수' '복종' '기계적인 반복작업'이라면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남을 원망하지 말고, 오늘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고쳐 나가면 안 되겠습니까? 교사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런 이야기는 교장들에게부터 먼저 해주라"고 하고, 교장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은 "교사들의 생각이 꽉 막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고쳐야 합니까? 언제 고칩니까?

언제까지 기다립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