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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임만근 「행복론」

by 답설재 2011. 9. 17.

 

칠 전 아파트로 들어오는 셔틀버스 운전기사에게서 들었습니다.

"잔잔한 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아파트 셔틀버스 두 대의 기사님은 두 분 다 매우 조용한 분들입니다. 처음에는 아직 낯이 설어서 그렇겠거니 했는데 벌써 반 년이 다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인사를 받는 것조차 쑥스러워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그동안 쓸데없이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월급이 너무 적어서 기운이 나지 않는가?'

'늘그막에 작은 버스 운전이나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나?' ……

 

그러다가 깜짝 놀란 일이, 바로 기사님의 그 발언을 들은 것입니다.

"잔잔한 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날 저녁 때, 아파트 저 아래 동네에서 한 아주머니가 승차해서 기사님 옆 자리에 앉았는데, 기사님과 익숙한 사이 같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서로 묻고 답하기를 하더니 기사님이 잔잔하게 미소지으며 얘기했는데, 잘 들리진 않았지만 '잔잔한 일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인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그 순간, 유치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휴일을 빼고는 매일 열 차례 정도 이마트와 전철역, 주민센터 등을 순회하는 것을 일과로 하는 그 기사님의 생활이 바로 그런 생활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기사님은 언제나 그 잔잔한 미소를 띄고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걸 저는 부끄럽거나 쑥스러워서 그러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요즘은 저에게도 먼저 인사를 하려고 했다는 것도 그제야 생각났습니다.

'그래, 그렇지.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은들 뭘 해.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뭘 해. 아무리 훌륭한 일, 중요한 일을 했으면 뭘 해.'

'그런 사람이라도 야인이 된 스트레스로 암을 앓고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사람은 얼마나 비참한 결말인가.'

'아, 저 기사님이야말로 훌륭한 철학을 가진 분이시구나!'

'나는 저런 분이 운전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다니는구나.'

 

 

 

 

그 기사님 얘기는 오늘 옥수역에서 「행복론」이란 시를 보고 떠올렸습니다.

'행복론'.

제목을 보고는 얼른 외면할까 하다가 첫 행('한해살이 풀이라고')을 보는 순간 다 읽고 싶어졌습니다.

 

 

 

행복론

 

 

임만근

  

 

한해살이 풀이라고

저도 왜 예쁜 꽃망울

달고 싶지 않으랴만

 

고만고만 살다가

말도 없이 구름도 모르게

몸 거두어 떠나는 걸 보면

 

한 웅큼

가슴에 고이는 부러움

 

 

 

'아, 이게 행복론이구나.' '행복이란 결국 이런 거구나.' ……

 

 

 

 

시를 다 읽고 심지어 어제 아침에도 들은 아내의 그 힐난도 떠올렸습니다.

"평생 그 많은 책을 읽어 뭘 했어요?"

'평생 책을 읽어 뭘 했는가!'를 주제로 한 아내의 힐난은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아내의 그런 힐난을 지금도 들으며 산다는 것이 참 한심한 일이기도 하지만, 고백하자면 그 힐난을 들을 때마다 저는 사실은 아내 몰래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야, 이 사람아! 책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 생활인으로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읽는 것이 아니야. 그건 하수(下手)들이나 하는 짓이야.'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천만에 말씀! 길은 무슨 길, 나는 적어도 그따위 속임수에 넘어갈 삼류 독자가 아니야.'

'굳이 내 관점을 알고 싶어? …… 공감할 사람이 적어도 좋아. 난 말이야. 무조건 책이 좋고, 책읽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기 때문에 읽었고, 아마 이 생각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을 거야. 이미 늦기도 했겠지만 당신의 힐난을 듣고 이제라도 그 생각이 변할 거라고는 기대하지는 마.'

'실용서적도 얼마든지 있지 않느냐고 하고 싶은 거지? 그럴 줄 알았어. 적어도 내겐 그따위는 책이 아니야. 이 생각에도 변함이 없을 거야. 말하자면 죽어도 실용서적을 읽고 싶진 않아. 죽어도!'

 

그런데 오늘 저 짧은 詩 한 편을 읽고 저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부터라도 도덕인 혹은 철학자가 되려는 각오로 책을 읽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생활인(이런 표현이 가능할까요?)이 되려는 생각으로 독서를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제 와서 그러면 저는 그만 '키하나' 노인 그러니까 저 유명한 '돈키호테'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만, '정말로 딴에는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데 아내 하나 만족시키지 못하는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것이 숙제가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 된 것입니다.

 

이런 숙제를 가지게 된 것은 저 시의 마지막 행, 그것도 마지막 단어 때문입니다.

"한 웅큼 / 가슴에 고이는 부러움"

"부러움"

한해살이를 보며 느끼는 저 시인의 부러움.

 

우선 결심한 것은 이것입니다. '다음부터 셔틀버스를 탈 때는 가능하면 앞자리에 앉아서 기사님을 잘 살펴봐야겠구나.'

아내가 들으면 한심한 위인은 결심조차 형편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선 '잔잔하게' 작은 일부터 고쳐보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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