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자 선중이 Ⅸ
Ⅰ
"까짓것 잘 하면 뭘 해. 한꺼번에 다 까먹는데……"
외손자의 전화 내용을 자랑했을 때 아내의 대답입니다. '한꺼번에 다 까먹는다'는 건 사실은 나 들어라는 반응입니다. 이럴 땐 나와 외손자가 한편이 되어야 마땅하지만-그렇다고 한 편이 되어 뭘 어떻게 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으므로 그러지도 못하니 답답하고 외롭습니다.
녀석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화를 해봐야 조근조근하지 않았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도 겨우 했고, 아내가 나에게 전화를 바꾸거나 내가 아내에게 전화를 바꾸면 차라리 귀찮아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올해 들어 확 바뀌었고, 학교생활이나 읽고 있는 책이나 친구들, 선생님 이야기 등등 어떤 내용이든 이것저것 구체적으로 들려주게 되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도 아내는 시큰둥합니다. 전에는 지금처럼 저렇지 않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야, 책을 읽을 때는 원래 천둥이 쳐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니까……"
다른 집 손자, 손녀는 병아리처럼, 새끼 새처럼 잘도 조잘대는데 우리는 외손자라고 하나 있는 게 저 모양이라고 부러워하고 투덜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니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도 반은 나 들어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천둥이 쳐도..... 어쩌구 저쩌구."
Ⅱ
어제 저녁만 해도 교내 독서 경시 대회 이야기, 방학 기간 이야기, 겨울방학 때 함께 지낼 이야기 등 장시간 얘기하고, 전화를 끊으려 하자 녀석이 얼른 그랬습니다.
"엄마가 전화 좀 바꾸라는데요? 나머지 얘기는 엄마와 하세요."
"응, 그래?" 하고 기다렸더니 어미가 바꾸어서 멋적게 말했습니다. "할 말도 없는데 저 놈이 바꿨어요."
그러자 녀석이 옆에서 급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지 말고 무슨 얘기라도 해드려요. 대화가 있어야지요. 저 때문에 힘드는 얘기나 어려운 얘기, 엉덩이 쪽에 뭐가 난 얘기라도 해드리면 되잖아요."
그 내용은 나에게도 다 들렸으므로 우리는 웃고 말았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도 참 신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벌써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그런데도 아내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지난 초여름까지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무슨 상품 홍보를 하던 사람들이 사진을 촬영했을 때, 함께 길을 걷던 녀석이 당장 쫓아가서 "왜 우리 할머니 사진을 찍었느냐?"고 묻고, 그런 일이 없다고 하자 "찍는 소리가 들렸는데 왜 아니라고 하느냐?"고 따져서 그들이 혀를 내둘르게 했다는 것을 두고두고 자랑하던 아내였습니다.
그러던 아내가 이 여름을 보내면서 저렇게 변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녀석이 방학을 하자마자 여기에 와 있는 며칠 새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한바탕 벌어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증거도 있습니다. 어제 저녁 그 통화 내용을 얘기했을 때 아내는 이런 말도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용산역에서 헤어질 땐 눈시울이 벌개져 가지고……"
'그래도'? '그래도'라니? 그 말에 무엇인가 비밀이 들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Ⅲ
'한꺼번에 다 까먹는다'는 건 좀 쑥스럽지만, 한마디로 성질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흥분하고, 오버하고, 난동을 부리고……"
아내나 녀석의 어미가 우리(나 혹은 외손자)를 보고 걸핏하면 하는 소리입니다. 물론 녀석의 어미야 직접적으로는 당연히 제 아들인 녀석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내 아내는 녀석이 하는 행동을 보고 비판하면서도 사실은 그 아이의 바로 옆에 나를 세워두고 하는 소리라는 걸 나는 당장 간파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따위 행동은 지긋지긋하다는 뜻입니다. 녀석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으며 그건 바로 내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 그럴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녀석은 나와 달라. 녀석은 내가 아니야!" 다르다? 그게 말이나 되겠습니까? "녀석은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 그렇게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나보다 더하다고 할 필요야 없겠지요. 어떤 경우에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녀석은 나처럼 그렇지는 않다"고 하면 좋을까요? 방금 증거를 대어 비난하는데 어떻게 녀석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녀석은 그래도 나보다는 낫다"고 하면 그애에게 도움이 되진 않고 '그래, 당신은 녀석보다 못해!'라는 반응만 돌아올 테니까 할 짓이 못될 것이 분명합니다.
Ⅳ
녀석은 올해도 담임 선생님을 잘 만났습니다. 어미의 말을 들어보면 철두철미하기 그지없고 무슨 일이든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대해 학부모들이 진저리를 칠 정도이며, "매우 까다롭다"고 하는 정도로는 그분의 성품을 제대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데도, 녀석은 그분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하나하나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 끊이질 않는다니 정말이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런 경우를 두고 남녀 사이라면 천상배필이라 하고, 친구 사이라면 죽이 맞는다고 하지요. 심지어 나쁜 점도 좋게 보일 정도가 되면 결혼도 하고 평생 헤어지지 않는 친구가 되기도 하는 거죠.
그런 선생님께서 지난봄에 계단에선가 굴러 다리가 부러져 오래 고생하시다가 방학 전에 출근하시게 되었으니 녀석은 이래저래 다행한 입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Ⅴ
이제 어쩔 수 없이 "흥분하고, 오버하고, 난동을 부리고……"한 사례를 이야기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음악시간이었답니다. 녀석의 분단에 큰북이 배당되었는데 한 아이가 그 북을 자꾸 울렸답니다.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듣지 않자 녀석은 드디어 그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고 그 아이에게 이렇게 도전장을 냈더랍니다.
"수업 마치고 남아라. 맞짱을 떠서 해결하자!"
그렇게 한판 붙게 된 그 싸움은 그러나 그걸 눈치채고 현장까지 따라나온 여학생들이 선생님께 알려서 어이없게도 수포로 돌아갔답니다.
아마 그 아이였을 것 같습니다. 운동회날 그 애 어머니께서 녀석에게 다가가 친하게 지내라고 한 모양인데 녀석은 그 부탁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 다 보는 앞에서 흥분하고 오버하고 난동을 부리고…… 우리 일에 왜 어머니께서 나서시는 거냐고 따진 거지요. 아, 참……
녀석의 행위를 지켜보는 제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날 제 어미는 전화로 "말도 하기 싫고 이제 더 이상 어쩌고" 했습니다. 이럴 때, 내 아내가 두고두고 내 성격을 이야기할 때, 내 딸이 내 외손자의 성격을 이야기할 때, 정말이지 나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을 뿐이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내 외손자의 성격이 차츰 좀 너그러워져서 나처럼 살지는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그 사태도 조용히 해결해주셨답니다.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시고 그 애에게는 녀석에게 사과하게 하시고……
나 같았으면 "야, 임마! 너 어른에게 그게 무슨 행패냐, 응?" 어쩌고 하며 함께 흥분하고 오버하고 난동을 부려서 어느 게 아이들이고 어느 게 학부모고 어느 게 선생인지 알지도 못할 상황으로 몰아갔을 텐데 녀석의 선생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녀석이 선하게 보인다는 어느 제자의 멘트를 읽고 생각난 얘기입니다. 녀석이라도 좀 너그러운 가슴으로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서 쓴 글이기도 합니다.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점 혹은 가치관 (0) | 2011.09.19 |
---|---|
외손자 선중이 Ⅹ- 방과후학교 한자반에서 생긴 일 - (0) | 2011.09.08 |
불가사의(2) : '다이아몬드 행성' (0) | 2011.09.01 |
전경린 『강변 이야기』 (0) | 2011.08.31 |
불법으로 투기하다 적발시는! : 걸으며 생각하며(Ⅲ) (0) | 2011.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