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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로스팅 전문: 걸으며 생각하며(Ⅱ)

by 답설재 2011. 8. 21.

 

 

 

 

 

로스팅 전문

- 걸으며 생각하며(Ⅱ) -

 

 

 

 

 

 

  어느 커피숍 창가에 바탕이 커피색인 초대형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대형인가 하면, 지난해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 시청 앞 대형 건물 옥탑에 내걸린 그 시장 후보의 대형 현수막만했습니다.

  그 현수막 내용이 가관(可觀)입니다. "로스팅 전문"!

  그렇게 커다란 현수막에 겨우 그렇게만 써붙였기 때문에 '로스팅 전문'이라는 다섯 글자는, 바람이 많이 불어도 끄떡없이 잘 보이겠지만 워낙 커서 바람이 불어봤자 별로 펄럭일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로스팅(roasting)

  커피의 구수한 향미는 로스팅 또는 브로일링(broiling)이라고 하는 고온의 볶는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나타난다. 온도는 220~230℃까지 점차 상승시키는데, 이로써 커피콩에 함유되었던 증기, 이산화탄소, 일산화탄소, 기타 휘발성 물질이 배출되고 커피콩의 무게는 14~23% 정도 감소하며 색깔은 짙은 갈색을 띤다. 볶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커피의 특징적인 향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커피를 볶는 방법은 커피가 들어 있는 금속 실린더 안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거나 숯·가스·전기 등을 이용한 열원 위에 커피가 담긴 금속 실린더를 돌리는 2가지가 있다. 볶는 과정이 끝나면 커다란 통 안에 넣어 급속히 냉각시킨다. 다음에는 잘못 볶아져 너무 희거나 검은 커피콩은 전자분류기에 의해 골라내고 우수한 품질의 콩을 선별한다.(DAUM 사전)

 

 

 

 

  한 마디로 커피를 맛있게 볶는 일을 전문으로 삼는 가게라는 뜻입니다. 그걸 그렇게 내세워 써붙인 것입니다.

  '맛있는 커피 드세요.' '커피콩을 잘 볶는 가게', '커피콩 잘 볶는 일을 전문으로 하여 맛있는 커피를 파는 가게'…… 그런 표현보다는 '로스팅 전문'! 그렇게 하면 짧은데도 무언가 더 '있는' 것 같고, 단순하게 볶는 것이 아니라 뭔가 아주 그럴 듯하고 게다가 복잡하고 심지어 신기하거나 신비로운 과정을 거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걸 노린 것이겠지요.

 

 

 그러나, 커피를 마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커피 가게에서 복잡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과정을 거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과정이 간단하거나 복잡하거나 간에 향기로운, 맛있는, 위생적인, 빛깔 좋은 커피를 요청할 뿐입니다. 심지어 '로스팅'을 하든지 말든지, 커피콩을 볶든지 말든지, 우리는 커피다운 커피를 마실 수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고급 커피라면서 돈을 많이 받는 대신 품질 좋은 커피를 내놓으면 우리는 만족합니다. 뭐 대단한, 혹은 신비로운 작업을 거치는 양, 시시한 사람은 설명을 다 들어도 전문가 몇 사람만 알지 허드레 같은 사람들은 뭐가 뭔지 잘 모를 것이라는 표정으로 그러지 말고, 눈속임처럼 간단해도 좋으니 제대로 된 커피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선, 까짓 커피 몇 잔 정도의 돈은 우습게 아는 사람들, 그런 커피만 찾아다니며 즐겨 마신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 '나는 이렇게 지냅니다' 하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우리 가게는 로스팅 전문이랍니다", "아주머니가 친구들 앞에서 커피의 맛과 향에 대해 자칫 실언(失言)을 하게 되면 우리 가게의 품위에 맞지 않게 되니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가게 주인이나 종업원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걸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법 커피를 즐길 줄 아는 '문화인' 흉내를 내고 싶은 사람들, 돈이 꽤 들어도, 거리가 좀 떨어져 시간이 많이 걸려도 즐겨 찾아가 마실 줄 아는 여유로운 사람이라는 표정을 짓고 싶은 사람들은, 돈도 흔하지 않고 시간도 별로 없는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얘, 이 가게는 로스팅 전문이래. 맛이 어때? 향도 괜찮지 않니?" 그럴 것 아닙니까? '쓸개 빠진'……

 

  회식을 마친 직장인들을, 그 가게로 데리고 간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할 때 그렇게 따라다녀 본 적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로스팅'이 뭔지 대충 짐작하면서도 공연히 아는 척하다가 긴 설명을 듣지 않으려면, 입을 닫고, 앞장 선 그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 좋습니다. 지금까지 커피를 꽤 마셔 봤지만 오늘 이 커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가게 주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니 바로 그런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알쏭달쏭한 현수막을 내걸었을 것입니다.

  "로스팅 전문!"("로스팅 만세!")

  "맛과 향이 그렇게 좋으시다면,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비싼 커피지만 얼마든지 리필이 된답니다. 꿀꺽꿀꺽 여름철 냉수 마시듯 마셔 보겠습니까?"

 

 

 

 

  '다방'이, '팔팔다방'이나 '대륙다방' '전원다방' '만남다방'들이 다 사라지고, 혹은 '커피숍'으로 통일된 후에 생겨난 우리의 멋진 '커피 문화' '커피 취향' '문화인 흉내'가 그 '로스팅 전문'이라는 현수막에 걸려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이 가게는 로스팅 전문이래" 하는 사람이 참 한심한 사람으로 여겨질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멋진 식사를 하러 '맛집'을 찾아 몇십 킬로미터쯤은 우습게 알고 달려가야 하며, 그 식당에서 커피까지 마시진 말고, 다시 차를 타고 '로스팅 전문 커피숍'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떄까지는 그래야 문화인 흉내라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문화인 흉내를 좀 내려면 피곤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어쩌면 돈을 벌기보다 그 돈으로 문화인 흉내를 내기가 더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문화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로스팅을 잘 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 명 한 명 문화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내라면 저는 그런 짓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문화인 흉내를 내지 않으면 피곤하지는 않다는 건 확실한 일입니다. 언젠가 박완서 선생이 한국외국어대학교 구내에서 만나 자판기 커피 한 잔 하자고 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커피야 전철역이나 대학 구내 자판기 커피만큼 맛있는 커피가 있겠어요?"

  그 겨울날 오전, 그렇게 이야기하던 '문화인' 박완서 선생이 그립습니다. 구리 교문리가 조용해서 좋다는 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