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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번역(飜譯)

by 답설재 2011. 6. 22.

우리는 왜 아프게 되는지, 우리는 왜 죽게 되는지,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비명(非命)에 죽는 경우는 자살과 타살의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와 다른 사람이 죽이는 경우. 그런데 그게 애매하기도 합니다.

 

'그는 죽어야겠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일까?'

'다른 요인은 없었을까?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다른 사람이 그 이유를 만들어 주거나 최소한 부추긴 것은 아닐까? 오히려 대부분 그런 경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프니까 그만두겠습니다.

 

자살에 대해서는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서 '자살을 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명쾌한 설명을 찾을 수 있는데, 다만 번역에 차이가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게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 궁금해서 기록해 두게 되었습니다.

 

 

 

 

『시지프 신화』라는 철학적 에세이에서* 자살을, 아니 '자살을 해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알베르 카뮈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바로 자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이성(理性)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일"이며 "그런 것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한다고 주장했던 갈릴레이도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자신의 주장을 너무도 쉽게 부인한 어쩌면 우스꽝스럽다고 할 수도 있는 일화를 그 예로 들었습니다.

 

 

 

 

한 번역본에 의하면, 카뮈는 위와 같은 설명에 이어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살은 오로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만 취급되어왔다. 그와는 달리, 여기서 우리는 먼저 개인이 품은 생각과 자살 사이의 관계를 문제삼고자 한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마치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때처럼 마음속이 고요해진 가운데 준비되는 것이다. 당사자 자신도 그렇게 될 줄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문득 방아쇠를 당기거나 물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어느 부동산 관리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자 사람들이 어느 날 내게 말하기를, 그가 5년 전에 딸을 잃은 다음부터 사람이 많이 변했고, 그야말로 그 일 때문에 아예 '골병이 들었었다'고 했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게 마음속이 침식당하여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 시작 단계에 있어서 사회는 별 관련이 없다. 벌레는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박혀 있다. 바로 거기서 벌레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삶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직시한 나머지 결국은 광명의 세계 밖으로 도피해버리게 되는 죽음의 유희, 바로 이것을 추적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속이 침식당하여 골병이 들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이미 그의 마음속에 벌레가 박혀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 사회는 별 관련(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그 '벌레'의 활동에 대한 묘사는 정말로 멋지고 그렇게 설명하는 것을 백 번이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회는 책임이 별로 없다는데 대해 사실은 그 벌레가 침투하게 한 것은 바로 '사회'가 아닌가 싶은 것이 한 독자로서의 입장입니다. 저 기막힌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자살에 대해 왜 사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인지, 정확하게 말하면 왜 사회와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번역본에서 "이 시작 단계에 있어서 사회는 별 관련이 없다"고 한 부분을 다른 번역본은 "사회는 이러한 시작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살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만 다루어져 왔다. 그와 반대로, 자살의 문제를 파헤치려는 이 시점(始點)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개인적 사고(思考)와 자살 간의 관계이다. 자살 행위는, 위대한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 마음의 침묵 속에서 준비된다. 그런데 그 사람 자신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밤, 그는 방아쇠를 당기거나 뛰어내린다. 자살을 한 어느 아파트 건물 관리인에 대해서, 나는 그가 5년 전에 딸을 잃었으며, 그 이후로 그가 크게 변했고, 그 체험이 그를 <파먹어> 들어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보다 정확한 말을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파먹히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시작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파먹는 벌레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 벌레를 찾아야 할 곳은 바로 인간의 마음 속인 것이다. 체험과 마주한 명징한 의식에서부터 빛으로부터의 도피에 이르는 이 죽음의 게임을 기어이 따라가 이해해야만 한다.

 

 

 

 

 

위의 책은 2010년에 나왔고, 아래의 책은 1993년에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7년 후에 출판되었고 7년 전에 출판되었다는 그것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무래도 썩 합리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별도의 설명은 변명이나 핑계 같아서 다 쓸데없는 일이고,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질 리도 없지만 두 출판사나 각 번역가로서는 무언가 더 설명하고 싶어할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작 단계에 있어서 사회는 별 관련이 없다"

"사회는 이러한 시작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관련' '관심'은 이 경우 그 차이가 엄청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어느 쪽이 정확한지 번역본만 읽어야 하는 처지에서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말아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나로서는 "사회는 이러한 시작들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쪽이 정확한 번역이면 더 '좋겠습니다'. '좋겠다'기보다는 사실은 그래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 한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나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기 전에 오랫동안 "속상하다"는 말을 수없이 해왔습니다.**** '사회'가 내 속을 상하게 한 것이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정말로 내 속(심장)이 썩어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벌레들이 침입해서 내 심장을 파먹은 것은, 제 마음이 스스로 썩어 들어간 것이니까 그 책임을 사회에 돌리지 말라고 하면 나로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만큼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번역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므로 출판사에서는 번역가에게 돈을 아주 많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덧붙입니다. '아주 많이'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할지 모르지만 책임감을 충분히 느낄 정도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출판사는 또 돈을 쌓아놓은 곳이 아니니까 사실은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수준도 세계 10위권이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속은 시커멓게 해가지고 돈만 많으면 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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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시지프 신화》를 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시지프 신화》는 철학적 에세이입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시시포스 또는 시지푸스(고대 그리스어: Σίσυφος['sɪsɪfəs], 라틴어: 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다.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잘 알려져 있다. 현대 작품으로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시지프의 신화》가 있다.

2. 알베르 카뮈 지음/김화영 옮김,『시지프 신화』(책세상, 2010-개정1판19쇄), 17쪽.

3.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1993, 중판), 16~17쪽.

4. [속傷하다]에 대한 사전의 해석 : [형용사] 화가 나거나 걱정이 되는 따위로 인하여 마음이 불편하고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