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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열상고전연구회 편 『韓國의 序跋』

by 답설재 2011. 6. 18.

열상고전연구회 편 『韓國의 序跋』

바른글방, 1993 초판 3쇄

 

 

 

 

 

 

 

 

'서발(序跋)'이 뭔가 하면 서문과 발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 옛 책에서 서문과 발문만을 골라 모은 책입니다. 물론 한문으로 된 글은 번역(역주譯註)을 하고 원문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멋진 서문과 발문을 모은 책이므로 당연히 멋진 책입니다. 혹이나 싶어 인터넷 서핑을 해봤더니 역시 '품절'입니다. 그런 책을 소개하려니까, 이런 경우 전에는 좀 고소했는데 이젠 가슴이 좀 아픈 걸 보니까 많이 뉘우친 것 같습니다.

 

멋진 서문과 발문들이, 시문집(詩文集)·시선(詩選)·문선(文選)·가집(歌集)·문학연구(文學硏究)·역사(歷史)·사상(思想)·어학(語學)·기행문(紀行文)·인물지(人物誌)로 나뉘어 소개되었습니다. 아래에 '역사' 중에서 『징비록』의 서문을 옮깁니다.

 

리가원(李家源) 선생의 머리말('서문')을 보니까, "옛 작가들은 어떤 작품이나 저서를 낼 때마다 으레 스스로 용의(用意)와 연기(緣起)를 서술하여 책머리에 붙여 독자로 하여금 요연하게 그 작가의 참된 뜻을 쉽게 알게 하기도 하려니와, 또 옛 사람의 저작에 뒷 사람으로서 그 작자의 뜻을 대술(代述) 또는 논평(論評)하되 그 원작(原作)을 익숙히 읽고 깊이 생각한 연후에 비로소 붓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박문(博文)·다식(多識)으로 자부하는 이가 있었답니다. 그는 고금(古今) 어떤 저적(著籍)이고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이 없다는 듯이 지체없이 설명했답니다. 그런데 홍명희(洪命熹) 벽초옹(碧初翁)은 그를 평하여 "아무개는 남의 서문만 읽어 행세하는 친구였지" 하곤 했답니다. 위의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 유성룡 선생의 「懲毖錄 序」를 옮기려고 하니까 "당신이 징비록을 읽어봤느냐?"고 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읽지 못했고, 번역본을 읽었습니다.

 

 

 

징비록(懲毖錄) 서

 

 

유성룡

 

 

 

《징비록(懲毖錄)》이란 무엇인가? 전쟁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전쟁 전의 일도 가끔 서술한 것은 그 시작에 근본을 둔 때문이다.

 

아아, 슬프다. 임진년의 화(禍)는 비참했도다. 열흘이 겨우 넘은 사이에 세 도읍을 막을 수 없어 사방이 기와처럼 무너지고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으니 오늘날이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이 도운 까닭이다. 또 임금의 어질고 도타운 은혜가 백성에게 굳게 맺혀 한나라가 망한 후에도 백성들이 나라를 생각했던 것처럼 그치지 앟았다. 임금의 사대(事大)하는 정성이 황극(皇極)을 감동시켰다. 형(邢)나라의 스승 같은 자가 거듭 났으니 그렇지 않았던들 위태로웠을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막겠다" 하였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나 같은 사람은 떠돌아 다니다가 위험한 시기에 나라의 중임을 받아 위태로운 것도 붙들지 못하고 없어지는 것도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 죄가 죽어도 면치 못할 것이겠으니 오히려 밭고랑 사이에서 쉬며 구차히 성명(性命)을 이어가는 것이 어찌 나라의 너그러운 은혜가 아니겠는가. 근심 중에 잠시 안정하여 매양 그 전의 일을 생각해 보니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을 용납할 곳이 없다. 한가한 사이에 대략 임진년에서 무술년 사이에 눈과 귀에 닿은 것들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장(狀)·계(啓)·소차(疏箚)·문이(文移)·잡록(雜錄)을 그 뒤에 붙였으니 비록 볼 만한 것은 없으나 모두 그 당시의 일들이라 버릴 수 없다. 밭에서 우거하며 삼가 충성의 뜻을 붙이고 어리석은 신하가 보국(報國)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한다.

 

<김경미 옮김>

 

 

원문은 힘이 들어 옮기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