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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1등급 학생들은 스스로도 잘해낼 수 있네

by 답설재 2011. 5. 9.

 

 

 

에릭 홉스봄이 젊은 날 그의 스승에게서 들은 충고랍니다.

 

"자네가 가르쳐야 할 사람들은 자네처럼 총명한 학생들이 아니네. 그들은 2등급의 바닥에서 학위를 받게 되는 보통 학생들이야. 1등급의 학생들을 가르치면 흥미는 있지만 그들은 스스로 잘해낼 수 있네. 자네를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보통 학생들이란 것을 잊지 말게."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한다는 건 대체로 학생들의 사고 활동을 불러일으키고 그 과정과 결과로써 대화를 주고받으며 다시 더 깊은 사고의 골짜기나 더 넓은 사고의 들판으로 데리고 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말을 잘 하는 아이들을 주 대상으로 하기가 쉽게 됩니다.

 

그런데 홉스봄은 1등급 아이들과 어우러져 뒤쳐진 아이들에게 "실례를 저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1등급인 아이들은 교사보다 더 영리하고 더 많이 알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교사는 1등급, 2등급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에게 실례를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2등급인 아이들을 주 대상으로 가르치면 답답하고, 표가 잘 나지도 않고, 얼른 고맙다는 인사를 해주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수업이 화려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얼른 생각해 내고, 얼른 발표하고, 똑똑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 아이들 때문에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말하고,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말하는 걸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 방해를 받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아는 것을 꼭 발표해야 아는 것으로 취급해 주는 건지, 왜 꼭 큰 소리로 다른 사람이 다 듣도록 얘기해야 하는지, 왜 좀 가르쳐 주고는 꼭 선다형이나 단답형 문제를 주고 답하게 하는지, 그런 것들을 이상하게 여기는 아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매긴 1등급, 2등급의 구분이 엉터리일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답답한 아이'는, 지금 우리의 이 학교, 이 교사들의 비위를 맞추는 요령이 없는 아이일 수도 있고, 우리와 영혼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아이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이 형태 말고는 없다고 생각하는, 혹은 이 형태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오늘날의 이 학교 형태를 답답해하는 아이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는 않다 해도, 가르치지 않아도 다 이해할 만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를 보면서 그 '2등급'인 아이는 교사가 얼마나 밉겠습니까. '자기네끼리 잘도 지내는구나.'

 

 

 

 

작가 유종호는 홉스봄의 이 기록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1

 

홉스봄은 이러한 생각이 대학만이 아니라 세계나 사회 일반에도 해당된다고 역설한다. 스스로 잘해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없는 삭막한 사회는 우리가 지향하는 넉넉히 인간화된 사회의 반대요 바로 그 역상逆像일 것이다.

 

 

 

 

<蛇足 (2011.5.11)> 홉스봄은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래서 꺼림칙합니까? 괜찮습니다. 어느 신문에 한국현대사학회 고문 이인호 교수의 「"좌·우, 역사 해석 다를 수 있지만 사실 왜곡은 안 돼"」라는 제목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그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2

 

― 학회의 외연은 크게 넓어졌지만, 아직도 젊은 진보 학자 참여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보수·우파 꼬리표를 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의 참여를 가로막게 된다. 사람들은 내 학문적 입장을 '보수적'이라고 하는데, 에릭 홉스봄(93)이 내가 존경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학자로서 객관적이고 책임 있는 연구 태도와 성과를 존경한다. 좌파 우파를 나누면서 출발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편향이다. 나는 학자로서 최장집 교수도 존경한다. 그런 분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좌·우, 보수진보를 넘어선 다양한 연구성과가 집대성된다."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CH, 1917.6.9~ )은 영국의 맑스주의 역사가. 영국 공산당 당원이자 공산당 역사가 그룹의 회원. 현재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Birkbeck College) 학장. 많은 근현대사 책을 저술했으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4권으로 구성된 홉스봄의 시대 시리즈가 있다. 또한 힘으로 정의와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폭력의 신화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미 제국주의의 논리를 인도주의적 제국주의요, 반드시 의심해야 할 위험한 사상이라고 논박한 책인 《폭력의 시대》(민음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3

 

 

 

 

  1. 유종호,「어둡고 괴로워라-1950년대의 대학가」,『현대문학』2010.8월호,209쪽에서. [본문으로]
  2. '조선일보, 2011.5.11. 인터넷 신문에는 [본문으로]
  3. 위키백과 내용의 일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