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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무서운 '중딩'

by 답설재 2011. 3. 10.

오죽하겠습니까. 고등학생보다 더 무섭다고도 합니다. 그럴 수밖에요. 천지를 모를 때니까요. 고등학생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는 애들이지요. 어떻게 할 방도가 없겠지요.

 

그렇지만 그 아이들은 누구네 아이들입니까? 누가 낳았습니까? 누가 가르쳤습니까?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진 아이들입니까?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했고, 그래서 뜨거운 맛을 보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럴까요? 형편없는 행동을 하는 그 아이들, 벌써부터 담배를 피우고 요즘은 동네 공원에서 어른들도 그러지 않는데 버젓이 부둥켜 안고 '사랑'(?)을 나누는 아이들, 싸늘한 날씨에도 애써서 뽀얀 넙적다리를 내놓고 돌아다니는 그 아이들이 멋지고 예쁘게 보입니다. 대견해 보이기도 합니다. 혹 학교에서 아무렇게나 가르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는 속이 상합니다.

'내가 가르칠 수 있다면 그따위로 가르치진 않을 텐데……' 용감하게 잠깐만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오늘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다녀온 어느 교수를 만났는데, 그 나라 학교에는 정년이 없어졌답니다. 양성평등이므로 남녀 차별을 하면 안 되듯이 연령 차별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 취지랍니다. 그 나라는 정년이 없어졌다는 말은, 괜히 해본 소리니까 "기분잡친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설마 퇴직한 사람이 다시 나타나서 "나도 가르쳐 보겠다!"고 나서기야 하겠습니까. 내가 <그 세상>에 나타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이렇게 <이 세상>에 있다가 또다른 세상 <저 세상>으로 가겠습니다. 절대로 안심하십시오.

 

다만 나도 교육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하는 소리니까 저 아이들을 남의 나라 아이들 대하듯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이, 내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는 듯이, 내가 하는 교육은 그 아이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심지어 그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는 그렇게 열심히 외운 '교육학(敎育學)'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기만 하지는 마시라는 뜻입니다.

 

 

 

 

 

 

  <덧붙임>

 

퇴직을 한 사람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거쳐온 학교는, 그 학교가 있는 동네 가까이에는 얼쩡거리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추한데 더 추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이니까 내가 나타나면 그 동네 사람들은 나의 유령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 흔한 모임 하나도 만들지 않고 그 학교를 나왔습니다. "내가 퇴직하더라도 우리 자주 만납시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자주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나를 만나러 억지로 나올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그들에게 욕을 먹어야 합니까? 

 

근무했던 두 학교의 홈페이지에는 가끔 찾아가 봅니다. 그리움입니다. 짝사랑, 그리움에도 그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홈페이지에서도 나의 흔적이 사라져갑니다.

졸업생 코너에 실었던 저 글도 곧 삭제되지 않을까 싶어서 캡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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