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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사라지는 것들 : 졸업앨범

by 답설재 2011. 1. 10.

첫 페이지 한 면 가득 독사진을 넣고 그 다음 페이지까지 집무 모습으로 가득 채우게 하는 교장들로서는 섭섭해할 일이겠지만, 졸업앨범이 사라진답니다. 그런 교장들에게는 '섭섭해 할 일'이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사라지는 것들 중에는 '그것 참 잘 됐다!' 싶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없어진다는데야……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지 인터넷판 기사 내용을 전한 아래의 스크랩을 보십시오. 졸업앨범은 벌써 판매량이 크게 줄고 있고, 그 이유는 학교들이 페이스북 등을 활용해 온라인 앨범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지 않습니까.

 

"에이, 영 없어지는 것은 아니네? 인터넷 앨범으로 바뀌어도 내 독사진은 실을 수 있을텐데 무슨 상관이야?"

그러신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가야할지 끝을 모를 분입니다.

 

우선 인터넷 앨범은 누가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오대륙사진관', '88스튜디오'? …… 당신의 말 한마디에 쩔쩔매는 그들 중 누가 만들 것 같습니까?

대륙사진관, 88스튜디오가 아니라면, 6학년 부장교사나 컴퓨터를 잘 하는 과학정보부장이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까? 정말 그러시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좋을지 난감합니다.

 

 

 

인터넷을 활용한 졸업앨범은 편집상으로는 어떤 변화를 보일 것 같습니까? 나로서는 우선적으로 교장 사진이 사라질 것 같다는 예측입니다. 아니, 교장 사진 때문에라도 종이에 인쇄하는 졸업앨범이 얼른 사라질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초·중·고등학교 졸업앨범을 한번 꺼내 보십시오. 맨 앞의 학교 전경 다음 페이지에는 뭐가 나옵니까? 교장 독사진, 그것도 한 면 가득, 아이들이 존경하기 때문에 있어야 하는 사진입니까? 그건 아니라면, 교장이 제일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있어야 하는 사진입니까? 세상에!

 

그것도 모자라 그 뒷면에 또 나오는 교장실 집무 모습, 교기와 우승기와 자개로 새긴 '교장 ○○○' 명패를 배경으로 한……

그 왜 그렇지 않습니까? 교감은 교장보다는 '낮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다음 페이지에 교장보다는 좀 작게, 집무 모습도 반 페이지만 차지하는 편집…… 아직도 그렇게 하면서 뭘 '학생중심 교육과정 운영'이니 '학생 자치활동'이니 합니까?

 

아무 생각없이 수십 년 전부터 해오던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까? 그게, 관례를 따르는 것이 교장 할 일입니까? 세상이 변하고 아이들은 더 빨리 변하는데, 그렇게 하고 앉아 있으니까 아이들이 답답해서 저렇게 튀는 것 아닙니까? 곧 또 '알몸 졸업'을 하니 어쩌니 하겠군요.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아이들이 돈 내는 앨범인데 왜 교장·교감 사진이 맨 앞에 나오고 그것도 그렇게 크게 나와야 합니까? 교장·교감이 그 학교 주인입니까? 학교운영위원들이 그렇게 하라고 결정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들에게 결정하게 했습니까? 교육청 지시 따르는 걸 좋아하거나 그 지시에 따르는 데 익숙하시죠? 그럼 졸업앨범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까?

 

 

 

또 어떤 변화가 올 것 같습니까?

뭐 하려고 3~5만원이나 거두겠습니까? 컴퓨터로 작업하고, 초등학교 아이들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고, 별로 돈 들 일도 없게 되면 거의 무료에 가까운 그 경비는, '학습자료비'나 '학급운영비' 같은 이름으로 당연히 국가가 부담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그 경비를 부담한다 해도 교장선생님 얼굴을 그렇게 크게 넣어줄 아이들이 없다는 걸 미리 알아두면 더 좋을 것입니다.

 

아, 참!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 걸 모르고, 아니 모른다기보다 "위에서 무슨 지시가 오지 않겠어요?" 그런 말 하기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할 수 없이 교육부장관이나 교육감 이름으로 작성된 공문을 전달해야 하는 교육지원청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용이야 보나마나겠지요. '학생 중심 활동에 의한 앨범이 만들어지도록 지도하라', '평소의 학습과정 중심 편집이 이루어지게 지도하라', '학년 단위보다는 학급 단위, 소집단 활동, 개인별 활동을 중시하라', '그런 활동에 의한 결과로 컨테스트 같은 걸 개최할 수도 있지 않느냐', …… 이런 내용도 포함되겠군요. '쓸데없이 옛날처럼 돈 거두고 그러지 마라' ……

 

 

 

공문이 오면 시행하면 됩니까? 미리 그렇게 하면 안 됩니까?

그럼, 좋습니다. 그 공문이 올 때 당신은 어떤 말을 하고 싶습니까? 다음 중에서 고른다면 몇 번입니까?

 

①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6학년 부장! 어떤 경우에도 내 독사진은 제일 앞에 한 면 가득 싣고, 자개로 만든 내 명패와 교기, 우승기가 보이는 집무 모습 사진도 들어가도록 아이들 지도 잘 하세요. 더구나 이젠 교비로 만드는 앨범 아닙니까?"

② (무안한 표정으로 공문을 내보이며) "그 참, 우리도 올해부터는 이렇게 합시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③ (자신 있는 태도로) "우리는 벌써 이렇게 하고 있지요?"

④ ……(아뭇소리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육지원청에서 이런 공문을 보내는 것 자체가 '학교 교육과정 자율화', '학교장 책임경영제'의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중에 고를 만한 답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한 가지 더 제시하겠습니다.

⑤ 아직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

 

 

<추신>

밝히기가 민망하긴 하지만 2005, 2006학년도의 용인 성복초등학교 졸업앨범, 2007, 2008, 2009학년도 남양주양지초등학교 졸업앨범에는 교장 독사진이 그렇게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그게 썩 괜찮은 일이었다면, 그 두 학교에는 그것이 전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전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런 걸 알아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 학교들을 나온 그 이튿날 내가 한 일들은 깡그리 사라졌을테니까요.^^

 

 

 

중앙일보, 2010.12.1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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