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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름붙이기

by 답설재 2010. 10. 25.

 

 

 

이름붙이기

 

 

 

 

 

 

 

 

  Ⅰ

 

  어느 전철역에서 어린이들의 그림을 모은 작은 전시회를 보고 핸드폰으로 찍어둔 사진입니다.

  무제(無題)……

  이런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이 작품에 '무제'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해준 분의 따듯한 마음을 헤아려보기도 했고, 제가 담임했던 그 아이도 떠올렸습니다.

 

  그도 이미 50대이니 오래 전입니다.

  자주 싸우고 말썽을 피우는 그 아이의 도화지는, 무슨 심보였는지 물감을 덕지덕지 쳐발라서 온통 거무티티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마음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라고 하니까 펴놓았지만, 그림은 무슨 그림……'

  기억으로는 그 아이의 가정환경은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각자가 그린 그림을 분단별로 칠판 앞에 세우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그날은 제가 직접 감상이라는 걸 해나갔는데, <무제>라고 이름붙이면 좋을 그 아이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건 말이야. 밤바다야, 밤바다. …… 내가 말이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입학시험에 실패해서 집에서 쫓겨났을 때 말이야. ……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드디어 대천 해수욕장에서 몇 달을 지냈는데, …… 그 때 밤마다 해변에 나가 앉아 생각을 많이 했지. …… 그때 내가 본 밤바다가 이런 모습이었어. ……"

  그 아이에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겠지만 그날 제 이야기는 분명히 오래 이어졌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화가가 되었습니다.

  제가 잘했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끔찍하다는 뜻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은 새삼스럽게 '나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무제(無題)는 아무래도 건방진 것 같고, 뜰에는 이름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운 풀들만 무성하고 창고에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까 대부분 쓰레기 같은 것만 모아왔습니다.

  쓸쓸하다면,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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