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신문 보기

공부의 왕도(王道) : 수석을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by 답설재 2010. 6. 27.

'한옥 예술가', 멋있는 닉네임이지 않습니까?

그가 공부의 왕도(王道)를 설명했습니다. 조선일보 기사입니다(2010. 6. 12, 토일섹션 Why?, B1, 4~5면, 문갑식의 하드보일드,「‘한옥 프런티어’ 안영환」).

 

"어떤 사람이냐?" 하면?

 

종로구 계동 뒷골목에 한옥 한 채가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대금(大琴) 가락이 객(客)을 맞았다. 방 네 칸에 정자(亭子) 하나, 한복판에 한 그루 소나무가 굽어 있는데 모습이 영락없는 거북이 등껍데기이다. 200평 공간. 청아하기 그지없다.

 

'락고재(樂古齋)', 이 집의 이름이다. '옛것을 즐긴다'는 뜻이다. 이 터의 주인은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였다. 거기서 문일평, 최현배 같은 우리 선비들이 일제에 맞서 '한국학'을 지키려 했다. 1934년 발족한 진단학회(震檀學會)다.

 

그 집에 일본인들이 줄서 있다. 하루 자는 데 20만원 가까운 돈을 기꺼이 지불할 태세다. 터와 인연 맺은 주인이 말했다. "한옥을 보면 가슴이 짜릿해지지요. 온돌에 누우면 '시원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우리 문화유전자지요."

 

"어떻게 하다가 그런 사람이 되었느냐?" 하면?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95번지를 몇 시간째 돌던 나그네가 있었다. 돈깨나 있어 뵈는 그는 과연 서울 강남에 빌딩만 여덟채를 가진 이였다. 그가 말했다. "이런 명당이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이가 주인인지 얼굴 좀 보고 싶소."

 

안동 락고재 맞은편 부용대는 해발 64m다. 언뜻 뒷동산 같지만 어엿한 태백줄기 자락이다. 정상에 오르면 태극 모양으로 하회마을을 휘도는 낙동강 줄기가 보인다. 그 뒤로 하회(河回)마을을 보호하고 있다는 만송정 솔숲이 짙다.

 

거기 네채의 초가가 세워졌다. 초가 안에는 편백나무 욕조가 있다. 거기 몸을 적시며 휘영청 밝은 달을 보다 외국인들은 운다. 조선 선비들의 품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초가집 주인이 또 큰소리쳤다. "그게 우리 풍류(風流)지요."

 

 

 

▲ 삐그덕 소리나는 문을 열자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다. 마루에 걸터앉아 막걸리 마시고 기왓장 너머 물끄러미 바라본다. 반질반질한 기둥에 기대 한옥 내음을 맡는다. 외국인 사로잡은 락고재의 안영환은 "가슴이 짜릿해진다"고 말했다.

/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이 한옥 프런티어가 공부를 하게 된 내력입니다.

 

안영환(安永桓·53)은 영락없는 '밥 장수'다. 마포·명동·선릉에서 한정식집 '진사댁(進士宅)'을 한다. 목동·명동·여의도에선 '제주미항'이란 고등어·갈치 전문점도 운영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한옥(韓屋) 예술가'라 했다.

 

'몽중(夢中)', 그의 호(號)다. '꿈속에 있다'는 뜻일 것이다. 호로 그의 팔자(八字)를 풀어보면 초년운(初年運)은 악몽이었을 것이다. 서울교대부국 나와 K중에 가려 했지만 나라가 정책을 바꿔 그를 '뺑뺑이 1세대'로 만들었다.

 

K고에 두 번 도전했다 다 낙방했다. 2차 명문(名門) 대광고에 진학했더니 이번엔 원치 않는 종교 문제로 말썽에 휘말렸다. "종교자유를 외치다 흠씬 두들겨맞았어요. 후배 중에 강모라고 있었죠? 사실 제가 그 친구의 원조였습니다."

 

입학 때 전교 20~30등쯤 하던 성적이 내리 비탈길을 탔다. 고3 때 반(班) 성적을 돌아보니 뒤에 야구특기생 두 명밖에 없었다. 뒤늦게 정신 차려 공부했지만 다시 서울대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모두가 의욕상실 때문이었다.

 

겨우 힘내 나라에서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번엔 호메이니가 혁명을 일으켰다. 팔레비왕(王)은 호메이니에게 쫓겨났고 장학금은 그의 품에서 날아갔다. 그 뒤 안영환은 테니스로 소일했다.

 

군 복무 하던 어느 날 광화문 외국어학원에서 만나 사귀던 지금의 아내가 선언했다. "나, 미국 이민 가야 해. 부모님 따라서. 같이 갈래, 헤어질래?" 제대 후 가보니 아내는 캘리포니아주립대 3학년 과정에 남편을 편입시켜 놓고 있었다.

 

그의 운명은?

 

전공이 듣도 보도 못한 '컴퓨터 사이언스'였다. 한국에서 팽팽 놀던 사나이가 된통 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였다. 그가 말했다. "왜, 수석들은 예습·복습만 한다잖아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거 맞는 말이던데요."

 

아침 7시 도서관에서 2시간 예습했다. 10%가 이해됐다. 교수 강의 들으면 80~90%가 머리에 들어왔다. 다시 교수 방 찾아 1~2시간 이야기하니 그제야 하루 배운 게 자기 것이 됐다. 졸업 때 그는 난생처음 수석(首席)이란 걸 해봤다.

 

공부의 왕도(王道), 그 답을 찾으셨습니까? 저는 농담을 하거나 제 독자를 실망시키거나 어떻게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도 공부라면 좀 한 사람이고, 명색이 교육자로 40여 년을 살았습니다.

 

예습과 복습, 얼마나 멋진 답입니까!

단지 그걸로,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수석을 했습니다.

여기 요즘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학원 가고, 독선생 붙여 주고, 또 뭣도 하고, 그런 방법이 아니라 바로 그 예습과 복습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예습과 복습보다 더 좋은 방법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저도 장담합니다.

약아빠진 방법으로 하면 제대로 할 수 없고, 언젠가는 다 들통이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교육행정가들을 향해 "아이들에게 예습과 복습을 잘 시켜보자!"고 하면 단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을걸요?

그러나 저 같으면, 제가 교육장이거나 교육감이거나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이라면, 다 집어치우고, 그걸 시책으로 내걸어보겠습니다. 당장 쫓겨날까요? 그래도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방법도 있었지'라고 할 것 아닙니까?

교육행정도 이제는

정말로 이제는

시책경영, 실적경영, 전시경영, 그런 것 말고

본질경영, 가치경영, 원칙경영, 그런 것에 매달리면 좋겠습니다.

뭐가 그리 복잡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