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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작별(作別)

우리는 그가 이런 교장이었다고 이야기한다

by 답설재 2009. 11. 11.

 

 

그는 황당한 교장이었다. 2004년 가을에 우리 학교에 온 그는 그 황당함으로 낯설게 다가왔다.

 

인근 학교 운동회를 구경 다니던 어느 날 오후에 “우리도 운동회를 하자”고 했다. 올해는 계획에 없고, 교육과정 계획은 이미 교육청에 보고한 사항이라고 하자, “계획은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운동회는 그냥 하는 게 아니고 계획을 세워 한 달 정도 연습해야 한다는 걸 상기시키자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냥 할 수 있는 운동회를 하자”고 했다.

 

할 수 없어서 그 운동회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여주자, 개회식의 ‘개회사’, ‘국민의례’, ‘대회장 인사’ 순으로 짚어 내려가다가 “대회장이 나냐?”고 묻더니 “싫다. 중요한 일도 좀 했지만, 대회장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왜 싫은가 묻자 “인물도 없고, 키도 작은데다가, 가슴에 ‘대회장’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커다란 꽃을 다는 것도 싫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린이회장에게 시키자.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나보다 똑똑하다”고 했다. 또 “달리기는 왜 키 순서대로 시키나?” “달리기에는 왜 모든 아이가 참여해야 하나?” “등수에 든 아이의 팔목에는 왜 고무도장을 찍나?” 하고 답변을 궁색하게 하는 질문을 끝없이 이어갔다.

 

그해 겨울, 가편집된 졸업기념 앨범의 첫 페이지에 실린 자신의 커다란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은 학교 서류에 붙은 증명사진을 확대한 것이었다. “아이들 같으면 첫 페이지에 교장 독사진을 넣겠나? 당연히 수학여행이나 입학식 사진일 것이다. 교장 사진도 교사들 사진 크기로 하고 우리 사진은 맨 뒤에 넣자. 다음해에는 앨범을 아이들이 편집하게 하자”고 했다.

 

그가 황당한 교장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황당함에 물들어 갔으므로 결국 우리도 ‘황당한 사람’들이 되어갔다. 그는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는 월요일 오후의 그 의례적인 직원회의를 못마땅해 했다. 우리는 그 시간만 되면 교무실에 모여서 각 부서별로 공문 내용을 전달하고 교내 행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퇴근시각에 맞추어 끝내려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남의 등을 쳐다보고 말해야 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으므로, 책상 위에 개인용 마이크는 없지만 최소한 서로 마주보고 앉아야 한다고 했고, “이런 회의라면, 지시·명령으로 일하는 것이 당연한 무슨 사무소 회의에도 미치지 못하겠다.”고 했다. 교직생활 20년이 넘도록 탈이 없던 회의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더 잘 가르칠 수 있는지, 그걸 이야기해야 교육자들의 회의다. 그래야 똑같은 교육활동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이라고 하자,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하면 그럴 것”이라고 했다. 그럼, 공문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그건 우리가 회의를 해서 다시 결정할 일이 아니므로 그냥 선택적으로 실천하면 된다.”고 했다. 공문이 많다는 불평에 대해서는 “아직 개선되지 못한 면은 있다 해도 공문은 교육 정보여서 앞으로도 날이 갈수록 더 많아지므로 짜증을 내기보다는 꼭 실행해야 할 사항은 그대로 따르고 좋은 정보는 받아들이면 된다.”고 했다.

 

마주앉게 되자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쑥스러웠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을 발표해야 한다니……. 그러나 우리의 회의는 발언할 기회를 얻기가 어렵게 되었고 발언을 하는 것이 자유롭게 되었다. 그렇게 해놓고, 그는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해주었다. 우리는 “회의를 하니까 학교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의견을 수렴해서 실천하니까 마음이 편하고 결과도 좋다”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의 눈에는 늘 아이들이 보인다. 그가 3년간 근무한 이 학교의 벽면에는 그가 있을 때 만들어 붙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벽에 그려 붙이는 것을 주문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좋아했다. 도 지정이나 교육부 지정 연구학교 운영 보고회를 앞두고도 점검·확인하는 것을 싫어했다. 우리가 애가 타서 꾸며 놓은 입간판이라도 눈에 띄면 불쑥 “누가 만들었는가?” 물었고, 정성들여 만들었으므로 기대감으로 대답하면, “아이들이 만들면 더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슨 발표회, 전시회, 운동회, 축제, 성금모금 등 크고 작은 행사(그의 말을 빌리면 ‘주요교육활동’)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이 그들의 생각과 솜씨로 안내문이나 홍보물을 만들어 붙이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그리고 꾸민 것보다 아이들의 작품이 더 좋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설명은, 불조심 포스터는 그려서 소방서에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교나 집에 붙이기 위해 그리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아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서바자회를 열었을 때 먼저 현장에 가보고는 “『미실』은 『화랑세기』에 기록된 한 여인이 타고난 미색으로 진흥제, 진지제, 진평제 등 당대의 영웅호걸들을 녹여내고 신라왕실의 권력을 장악해 나간 일대기를 그린 소설이므로, 비록 학부모들에게 판매할 책이라 해도 아이들을 주 고객으로 하는 학교에서의 바자회라는 걸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담당교사와 사서교사, 도우미 학부모들이 선정하고 도서선정위원회를 통과한 도서바자회 목록이었지만, 그날 몇 권의 책이 그 목록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는 독단적인 결정을 싫어한다. 또 조용히 있다가 가려고 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우리가 만든 문서에 사인을 하는 절차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은 ‘감독관’이 아니고 필요할 때 자신의 이론이나 경험으로 도움을 주는 ‘자문역’이라는 걸 강조했다.

 

그렇게 지내다가 드디어 ‘학교교육과정’을 보게 되었고, 그는 '이 문서는 우리 학교만의 교육 프로그램이니까 남의 학교 문서를 다운받아서 적당히 수정하여 묶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난생 처음 ‘교육과정 워크숍’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그게 발전해서 나중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 가서 한국교육과정학회와 공동으로 학교교육과정 평가에 대한 ‘세미나’라는 것도 해보았다.

 

'교육과정 워크숍'을 하기 위해 ○○콘도까지 갔었는데 이튿날 새벽 폭설이 내리자 당장 학교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제 그 워크숍이라는 걸 망쳤나보다’ 했는데, 교무실에서 그해의 교육과정을 반성하고 그 결과를 다음해 계획에 반영하자는 토론을 지켜보고는 ‘성공적’이라고 했다.

 

그렇게 토론하여 결정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런 절차를 거쳐 우리가 만든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다. 늘 “혼자서 기안한 100점짜리보다 여럿이 결정한 70점짜리 계획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또, 학교교육과정에 붉은색 펜으로 ‘반성·평가’ 결과를 기록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수십 년간 되지 않은 일로 장난하지 말자”면서 “이렇게 가르쳤더니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했다”, “이 계획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다음에는 사전예고와 홍보에 힘써 참여율을 높여야겠다”, “이 교과의 체험학습은 계획에 미치지 못했다” 같은 평범하고 실제적인 내용을 기록한 보고서를 써서 홈페이지에 탑재해 나가자고 했다.

 

어느 교사가 보여준 수업공개 지도안의 목표를 고치자고 하여 교사용지도서에 나와 있는 것이라고 하자, “그 지도서는 바쁘게 만들었기 때문에 옳지 못한 부분도 많다”고 하여 ‘세상에 우리 손으로 고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가령 ‘초파리의 생김새를 관찰하여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다’는 목표를 보고는 “과학시간에도 꼭 설명해야 하는가? 에디슨도 잘 설명했다고 하던가?” 물었으며, 점선으로 초파리의 윤곽을 나타낸 위에 아이들이 손질하도록 만들어진 교과서를 보고는 “창의성을 말살하는 과학교육의 표본”이라고 했다. ‘창의성 교육’은 과학 시간이나 체육, 도덕, 국어, 수학, 실과, ……,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활동에서 강조되어야 한다고 했다.

 

‘가을 동산’은 도화지와 풀, 과일, 칼 같은 걸 풍부하게 준비해서 광교산에 올라가 온종일 다 배우고 내려오라고 했고, 계산 단원이 쉽다면 학습시간을 ‘팍’ 줄이고 도형 단원이 어렵다면 그 시간을 ‘죽’ 늘리라고 했다. 걸핏하면 1학년 아이들에게도 보고서를 쓰게 하는 걸 좋아했다. 그는 아이들의 작품을 보면서 “이게 바로 논술”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학습에서 부모의 손길이 미친 걸 보면 당장 그 교육활동이나 행사를 집어치우자고 했다.

 

1년에 두 번만 가던 현장체험학습을 여섯 번으로 늘려놓고도 “교육과정을 원활히 운영하려면 열두 번은 가야 하는데……” 했다. “그러다가 언제 진도를 다 나가겠느냐?”고 물으면 “답답하게 허구한 날 뭐 하려고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느냐?”고 했다. 그는 십여 년간 우리나라 교육과정과 교과서 정책을 담당한 교육부 관리였다. 그런 그가 그렇게 말하면 대답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 학교에서의 3년간 한 번도 청소 좀 하라거나 아이들이 떠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떠들면 그냥 웃었다. 시끄럽지 않은지 물으면 “아이들이니까 떠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교실에 나타나면 저학년 아이들은 스타가 나타난 양 그를 둘러쌌고, 고학년 아이들은 뉴스거리처럼 이야기했다. 그렇게 대하는 아이들 때문에 미안해하면 “좀 그러면 어떠냐?” “학교도 사람 사는 곳이므로 정겨워야 당연한 것 아니냐?”고 했다.

 

1학년 어느 교실에서 방울토마토 때문에 여자애의 흰 바지가 엉망이 되는 소동이 벌어졌을 때 그는 이메일로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해서 그 메일을 본 담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했다. 절룩거리는 아이를 업고 보건실로 가며 아이가 안심할 수 있게 속삭여 주었고, “아이들을 잡아놓아야 공부가 제대로 된다”는 말을 참 싫어했으며, “단 한 명이라도 방치하거나 소홀히 하면 우리는 결국 망하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회장, 반장이 된 아이들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낙선한 아이들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났던 것을 행운이라고 한다. 그러나 톤이 높지도 않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교사를 힘들고 바쁘도록 해서 아이들도 덩달아 바쁘게 했다. 가령, 체험학습사진전을 하자고 해서 사진을 모으고 심사를 했다. 그는 심사 결과를 보고 두 번이나 “심사가 잘되지 못했다. 아이들이 심사하면 이 작품을 대상으로 뽑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의 심사를 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학부모의 입김이 스며든 작품, 학부모가 대필해준 사진설명을 구분하게 되었다. 교사가 애써서 세련되고 멋지게 고쳐준 사진 제목 ‘여름날 원두막에서’보다 아이가 붙인 제목 ‘수박 먹기’가 더 좋은 제목이니까 그냥 두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가 명단만 제출하면 시상을 허락하는 교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서류에 사인이나 하는 교장노릇이 싫다”고 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럴 때의 그는 아이들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우리가 머릿속에 아이들을 넣고 이야기하면 그는 신이 나서 대화를 이어가게 해주었다.

 

그는 여러 사람의 연인이다. 대하기는 어렵지만 경계하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갔다. 무엇이든 천천히 쉽게 풀어나갔다. 지금은 가고 없는데도 그를 찾는 전화가 온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다양했다. ‘오빠’라고 부르는 학부모도 있었고, ‘수호천사’를 자청하는 학부모도 있었다. 그에게는 나이가 많건 적건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과 미소가 있다. 그래서 ‘흠모한다’, ‘사랑한다’, ‘좋아한다’, ‘존경한다’는 말들이 잘 어울리는, 여러 사람의 연인이다.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이웃학교로 전근 간 교사가 찾아와서 “자신이 행복한 교장인 줄은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있던 교장실은 소박했다. 책과 아이들의 작품 몇 점과 그가 좋아하는 화분 몇 개만 있었다. 그 화분의 나무줄기가 저절로 자신이 앉은 책상 위로 늘어지고 있다고 좋아했다. 그는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쓰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 했다.

 

노래방에는 가지 않지만 ‘해변의 여인’ 한 소절을 쑥스럽게 부르며 미소를 짓던 그는, 성복동의 봄날 뻐꾸기 울음소리나 가을날 교장실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가슴 아파했다.

 

우리는 비 내리는, 혹은 눈 내리는 날 아침에 습관처럼 그의 출근길을 걱정하고 있다.

 

 

 

- 2007년 겨울, 용인 성복초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어느 교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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