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어느 날 교장선생님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2학년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지나가다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교장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웃음이 나면서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언짢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의아하기도 했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 교장선생님은 ‘이상한’ 교장할아버지다. 근엄한 교장이 아니라 한없이 편안한 시골할아버지다.
아이들 교과서 뒷장에 나오는 편찬·심의위원이기도 한 우리 교장선생님은 오늘도 한국교원대학교에 교장자격연수 강의를 하러 갔다. 한 달에 두세 번 교장, 교감, 전문직 자격연수나 직무연수에 강의를 다닌다. 그러나 1년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이런 대외적 지위나 평판보다 더 커다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이 학교에 오기 전까지 느낀 것과는 다른 ‘학교공동체’를 알아가고 있다.
지난 1월, 이 학교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있다. 교장실에는 어떤 업체 사장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교장실 문이 민통선 철조망도 아니지만, 업체 사장이라는 신분으론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이상했다. 혹 복도 쪽 문이 열린 시간에 행정실 눈을 피해 교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아주 친절하고 자연스럽게 행정실로 데리고 나와 나에게 안내해주셨다. 지금까지 다른 학교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반대 상황도 벌어진다. 아이들에게 상을 주는 월요일만 되면 교장실 바로 옆 행정실에서는 전화를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다. 쉬는 시간 동안 교장실에 들어가 상장을 받기 위해 기다리며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이다.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악수를 나누며 상장을 건네주는 주름진 손은 시골외할아버지 손처럼 따뜻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열린 그 마음은 학교 운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진행된 행사나 그날그날 벌어지는 일일생활이 홈페이지를 통하여 바로바로 학부모들에게 공개된다. 학교행사를 마치면 설문조사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를 다음 행사에 반영하는 ‘열린 교육’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학교 홈페이지는 볼거리가 많다.
예를 들어 정문에 내거는 현수막도 다르다. 아이들이 응모한 작품 중에서 가장 기발한 생각이 현수막으로 걸린다. 모든 것이 아이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고, 모든 것이 ‘이상한 할아버지’의 힘에 이끌려 변화하고 있다.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아이들이 전부 내 손자 같아……. 다 귀여워.”
이런 교장할아버지와 함께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이들을 손자손녀로 여기고, ‘이 아이들이 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교장선생님, 그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 교육철학이 우리의 학교 현장을 진정 ‘따듯한 곳’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장선생님을 통해 느낀 것들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되돌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2009년 11월 3일, 늦가을 유난히 쌀쌀한 날에
행정실장 경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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