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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강기원 「장미의 나날」

by 답설재 2009. 9. 7.

장미의 나날

 

 

                    강 기 원

 

 

그 동네에선 우리 집 장미가 제일 붉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집집마다 장미가 있었지만

유독 장미집이라 부르곤 했는데요

식구들이 모두 단잠에 빠져든 밤

아버진 휘늘어진 넝쿨 밑동에

아무도 모르는 거름을 붓곤 했는데요

나 홀로 깨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는데요

비밀스런 겹겹의 꽃잎은 뭉게뭉게 자꾸 피어나고

장미가 붉어지는 만큼 나와 동생은

자꾸 핼쑥해져갔는데요

그러고 보니 엄마의 낯빛도 갱지처럼……

이상한 건 향기였지요

수백 수천 송이가 울컥거리며 피워내는 피비린내

마당을 넘어 집 안까지 기어든 넝쿨은

소파를 뚫고 곰팡이로 얼룩진 벽을 타고

생쥐가 들락거리던 아궁이 속에서도 붉게 검붉게

소문 같은 혓바닥을 내밀기 시작했는데요

그 무렵 우린 아버지의 주문 따위 필요 없이

스스로 나무 밑동으로 걸어가 누웠던 거지요

걷지 못하는 동생이 제일 먼저 다음엔 순진한 엄마가

그리고 의심 많은 저까지

오로지 담의 안팎으로 풍성히 늘어질 장미를 위해서 말이에요

장미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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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원 1957년 서울 출생. 1997년『작가세계』등단. 시집『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바다로 가득찬 책』. <김수영문학상> 수상.

 

 

『현대문학』2009년 9월호, 174~175쪽.

 

 

 

 

 

6․25는 끝났는데도, 지금 생각해보니 환장할 만큼 먹고입을 것도 없고, 그런데도 서럽다는 말도 할 줄 몰랐던 그 세월의 아득한 한여름에 외딴집, 말라깽이 중년 남자는 이름까지 얌전하기만한 딸 玉女를 마당에 내동댕이쳐서 곱사등이 앉은뱅이를 만들어놓고,

그러면서도 그렇게 살아가기가 어려웠는지, 학교 유리창을 귀신같이 다 빼다가 흑백사진 넣는 액자를 만들어 팔았는데

유리창이 동이 났는데도 곱사등이 앉은뱅이 계집애가 죽기는커녕 울지도 않고 앉아 있기만 해서, 이번에는 학교 창문을 바른 창호지를 귀신같이 오려다가 물감을 들여 색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마당가에 매달아 놓았지만, 풀과 나뭇가지, 흙이나 돌, 시냇물, 구름과 바람만 가지고도 종일을 잘 놀아버리는 우리가, 그 색색의 바람개비들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자,

언제 어디로 갔는지, 곱사등이 앉은뱅이 계집애까지 데리고 그 외딴집 온가족이 사라지고 없는데도, 마당가의 접시꽃, 모란꽃은 그야말로 환장할 만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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